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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심

본문 / 마 8:14-17

 

1. 연약한 인간

세상에는 수 많은 인간들이 살아가지만 그 인간들 중 그 누구도 짐을 지지 않고 사는 인간은 없습니다. 돈 문제, 자식 문제, 부부 문제 등 온갖 세상 문제가 인간들의 짐이 되어 인간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문제들만 해결이 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기에 교회에 와서도 예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누구시든 상관없이 자신을 짓누르고 고통을 겪게 하는 문제들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생존의 문제를 믿음을 통해서 해결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기에 교회에서 전파되는 생명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교회에서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열망이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문제가 짐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주는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찾는 신자의 마음가짐이 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기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생명의 세계가 있음을 잊어버리고 오직 생존의 문제에 마음 뺏기고 살아가는 자기 자신이 미워져야 하고 참으로 나약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만 하고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는 것도 우습게 여겨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교회에서 맛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교회가 예수님을 인간의 생존 문제에 도움을 주는 분으로 바꾸어 말한다면 교회에서 누리고 맛볼 수 있는 은혜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세계에 대한 욕망을 더욱 굳건히 하는 결과만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는 다니지만 결국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어떤 은혜와 기쁨을 기대하십니까? 교회 자체가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란 종교를 취미로 갖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신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과 감격은 앞서 말한 대로 복음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돈으로 사는 세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세상이 있음을 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는 기존의 세상이 우습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동안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자리하던 생존의 문제들로부터 자유하게 됨으로써 누리는 쉼과 가벼움이야 말로 교회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과 감격인 것입니다.

물론 이 기쁨과 감격은 교회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쁨과 감격은 교회에서 전파되는 생명의 말씀, 즉 복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는 신자가 기대하고 열망할 것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고 또 목사는 온 힘을 다해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이 기쁨과 감격을 맛본 신자는 교회를 졸업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맛본 하늘의 좋은 것을 지키고 보존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신이 맛보고 누린 하늘의 좋은 것을 지키고 보존하면서 평생토록 복음의 기쁨과 은혜 안에서 살려면 사단의 유혹을 이길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흩어지고 다시 세상을 보게 되면 잠시 내려놓았던 세상의 문제들이 또 다시 무거운 짐으로 솟아오르게 됩니다. 은혜의 기쁨을 누린 감격도 사라진 채 세상 문제로 눈물 흘리면서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교회를 찾아와 말씀을 들음으로써 다른 세계가 있음을 잊은 채 세상의 문제로 근심하며 살았던 자신을 미워하며 예수님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순간도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께 나아간 적이 없는 연약하고 무능한 자일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2. 연약한 자를 찾아오신 예수님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7)고 말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모든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태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또한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후에 예수님께서 병 고치신 세 가지 기적을 말합니다. 이 세 기적이 단지 병자를 고치신 능력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라면 성경은 생명의 책이 아닙니다. 다만 ‘병이 낫고 싶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예수를 믿으라 예수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는 말을 하는 주술적인 내용의 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이처럼 주술적인 내용의 책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의 현실이지만 말입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것과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것, 그리고 베드로 장모를 고치신 내용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이스라엘에서는 소외 계층이라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는 유대인이지만 문둥병으로 인해서 저주받은 자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으로서 역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개로 취급받는 사람입니다. 물론 백부장이 가진 권력이 있기 때문에 외적으로 무시 받는 일은 없었겠지만 내면적으로 이스라엘에게는 멸망을 받을 개 같은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는 여자로서 역시 이스라엘 안에서는 소외 계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병 환자와 백부장은 직접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베드로의 장모에게는 예수님이 찾아가신 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인간은 참으로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연약함을 아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친히 그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을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더군다나 베드로의 장모는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2)라는 말을 하였고, 백부장은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8:6)라는 말을 하면서 간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장모는 그 어떤 간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손을 만지시면서 열병이 떠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기도하지도 않았는데 병이 나은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베드로 때문에 장모를 고쳐주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도 인맥을 따라 일하시는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집은 갈릴리 호숫가의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있었고 예수님은 이 집에 자주 기거하셨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장모도 예수님을 알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것은 그가 예수님을 알았다는 관계 안에서의 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사랑이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3. 왜 예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가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인해 의식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는 간구를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쳐주신 것은 우리가 왜 예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가를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현실이 마치 열병이 걸린 것처럼 혼미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에 취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는 복음이 다가와도 복음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다가와도 그 말씀 앞에서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도 모릅니다. 다만 자기 생존에 정신 팔려 살고 있을 뿐입니다. 열병에 걸려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교회에 와서 예수를 부르면서 헛소리만 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마치 열병에 걸려 누워 있는 베드로 장모와 같습니다. 그냥 놔두면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만 하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열병을 떠나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정신이 혼미한 우리를 제정신이 들게 해서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기를 위해서만 살던 우리를 주를 위해 사는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혼미한 상태에서 깨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자신의 실상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의 길인가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하며 거짓의 길로만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연약은 필히 죽음과 연결됩니다. 이 연약함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죽음을 예수님이 담당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심으로써 우리는 죽음에서 해방되었고, 우리의 죽음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으로 이전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인간의 죽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길은 오직 예수님뿐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을 담당하신 예수님으로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의 관심사인 세상의 문제를 끄집어낸다면 그것은 열병에 걸려 정신이 혼미한 자의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헛소리만 지껄이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비록 입으로는 죄인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우리의 속마음을 예수님 앞에서 감출 수가 없습니다. 내 속에서는 헛소리만 외쳐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우리가 교회에서 생명의 말씀을 만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우리의 속을 쪼개며 헛소리만 지껄이는 나 자신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찾아오셔서 나의 연약함을 담당하신 사랑과 은혜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세상의 문제에 마음 뺏긴 채 나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나로 인해 상한 심령이 되게 합니다.

이러한 나는 오직 예수님으로만 되어집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나를 어루만짐으로써 열병이 떠나가고 혼미한 상태에서 바른 정신이 들게 하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주를 믿는다는 우리가 교회에서 원하셔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마8:16)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세계입니다. 말씀의 세계 안에서 세상 문제, 즉 우리의 생존과 연관된 문제는 사소한 것으로 희미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소한 것으로 여겼던 생명의 문제가 우리 인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로 우리 마음에 퍼지게 됩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신자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 때문에 사도가 옥에 갇혀서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과 저주와 비참함을 예수님이 모두 담당하시고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의 자리로 돌려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지금도 성령을 보내셔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예수님의 이 일을 믿는 것이야 합니다. 오늘도 그런 주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우리는 혼미함이 아닌 정신 차려진 자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 땅에 것이 아닌 영원한 하늘의 것을 구하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이 은혜와 감사와 기쁨과 감격을 놓치지 마시고 온전히 누린바된 아름다운 인생이시기를 바랍니다.

 

 

( 말씀 복습하기)

 

1.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신자의 마음가짐과 또 교회가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마태복음 8장에 등장하는 나병환자와 백부장 그리고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장모의 이야기 중에 공통점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5. 오늘날 우리가 베드로의 장모처럼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6. 오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연약함과 예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7.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의 장모처럼 열병에 걸려 혼미한 자의 헛소리는 우리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합니까?

 

8.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복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까?

 

9. 신자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말씀의 세계의 기쁨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도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하시ㅐ는 일은 무엇이며 또 그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떤 자로 살아간다고 합니까?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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