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월 25일 / 마태복음 56. (마 8:23-27) 풍랑과 믿음

by 관리자 posted Jan 2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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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풍랑과 믿음

본문 / 8:23-27

 

1. 세상속의 신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들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구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 소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다 불에 살려져 연기같이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어떤 것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을 가고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에서 고통도 죽음도 없이 행복하게 산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꿈을 꾸는 천국이며 사후의 세계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혹자들은 요한계시록에 황금보석으로 꾸며진 새 예루살렘성이 있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황금보석으로 꾸민 새 예루살렘은 건물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아 나온 자들이 새 예루살렘 곧 그리스도의 신부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만큼 어린양의 신부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존귀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는 그 날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사는 세상은 신자의 그런 삶과 믿음을 용납해 주지 않습니다. 신자에게 있어 신자가 살아가는 세상은 골리앗과 같은 대적할 수 없는 강대한 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때가 되면 세상은 멸망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항상 세상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세상에서의 일 때문에 두려움에 떨기도 합니다.

신자는 천국을 믿는 사람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라라는 것도 잘 압니다. 세상에서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같은 것들, 즉 사람들이 꿈에서라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든 것들이 천국으로 가는 일에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잘 알면서도 항상 마음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 붙들려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권력이라도 있고 싶어 하고, 권력이 없으면 돈이라도 있고 싶어 하고, 이도 저도 아니면 뛰어난 자식을 통하여 세상사는 기쁨을 누려보고 싶은데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낙심하고 인생을 한탄하며 살기도 합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수없이 듣지만, 그 말도 들을 때일 뿐 눈에 보이는 것들로 여전히 세상에서 든든한 거처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것이 지금의 우리의 삶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나약함과 믿음 없음을 생각하면 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를 처지에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찬송하며 기도했던 사도 바울의 믿음이나 또한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의 선진들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들의 신앙이 부러워지기도 합니다.

그런 신자이기에 신자는 자기 믿음의 현주소에 대해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자의 거처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런 예수님을 믿는 신자 역시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시편 90편의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90:1)라는 말씀처럼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세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에 든든한 거처를 만들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거처가 든든하지 못하다 하여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먼저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 놓인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영적인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믿음의 형편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관심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믿음이 적거나 게을러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의 문제로 염려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신자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 든든한 거처를 만드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죽은 자들의 방식 그대로 살아가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나라를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일은 영혼이 죽은 자들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죽은 자의 세상과는 단절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죽은 자의 세상에 자신의 거처를 든든히 세우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길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거처에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행하신 일

지난주 본문의 마지막 말씀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8:22)고 하심으로 주를 따를 것을 말씀하시고 오늘 본문의 첫 말씀은 그 주님의 말씀을 이어받아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8:23)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주를 따르는 자들의 대한 내용입니다.

주를 따르는 신자로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신자는 권세 있는 예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마련된 거처로 인한 안도감보다는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쁨과 평강이 있는 것이 영적인 신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자가 세상의 거처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넙니다.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뒤덮일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께 달려가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8:25)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8:26)라고 책망하신 후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이 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은 믿음이면 다 된다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풍랑 때문에 무서워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신자는 어떤 풍랑이 닥쳐도 오직 함께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믿는다면 주님이 우리의 불안과 염려를 없애주시고 풍랑에서 구원해 주십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교훈일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만 믿으면 어떤 풍랑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도 염려하지도 않고 예수님처럼 평안히 잠자는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에서도 예수님처럼 평안히 잠자지 못하고 무서워했다는 것 때문에 믿음이 작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풍랑을 보고 무서워 한 것을 믿음이 작은 것으로 책망을 하셨다면 믿음이 크다는 것은 풍랑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거센 풍랑이 부는데도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또한 바닷길에 경험이 많은 선원이라면 어지간한 풍랑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풍랑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은 소위 담대한 믿음을 말씀하신 것으로는 볼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났을 때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세를 알아보았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8-29)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란 것은 그 가르치심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칠 때에 자기들의 스승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 말한다고 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이렇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 권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말씀에서 가르치시고는 이어서 마태복음 8장에서는 우리가 본대로 세 가지 치유사건이 등장합니다.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최초로 나병 환자를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하라고 하셨을 때에 즉시로 깨끗해 졌습니다. 이러한 권위와 권세는 사람에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시면서 이방인 백부장을 통하여 예수님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로마가 유대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감히 나아오지도 못하고 말씀만 하시면 이루어질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권위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친히 배에 타고 계시는데도 제자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배에서 평안히 주무시는데 제자들은 두려워 죽겠다고 예수님을 깨운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믿음이 작다는 책망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른다는 책망입니다. 말씀으로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눈이 없다는 책망입니다. 그렇게 책망하시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그러자 곧 잔잔하게 되었을 때에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8:27)고 하면서 놀라고 있습니다. 결국 마태복음 8장의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신 일들을 통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 믿음이 작다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3. 믿음이 작은 자

그러면 믿음이 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6:30)라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농사하지 않고 길쌈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왜 너희들은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이 작다고 하는 책망은 생활의 염려입니다. 생활의 염려란 곧 내일의 염려로 인한 재물의 유혹입니다. 이러한 염려에 사로잡혀 살면 결국 자기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재물을 믿고 살 수 밖에 없음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작은 자라고 합니다.

또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4:28-33)고 합니다.

이 말씀도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지 않고 제자들만 건너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때 예수님께 바다 위로 걸어오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만일 주님이시라면 자신에게도 명하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니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갑니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니 물에 빠져가니 주님께 구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붙잡으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신자의 세상에서의 신앙생활이란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면 그 세상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살이를 하면서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사는 지로 늘 점검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앞에 서서 말씀을 보고 듣는 시간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도 보면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16:5-8)고 합니다.

여기도 보면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하신 내용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누룩이라는 말씀을 듣고서 떡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누룩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을 떡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듣는 제자들이 동상이몽인 것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내용이 다른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떡을 염려하는 것을 책망하시면서 믿음이 작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믿음이 작은 자라는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내일의 염려로 두려워합니다. 풍랑 이는 배와 같은 이 세상의 흔들림 속에서 두려워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즉시로 잔잔해집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가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즉시로 바다가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은 구약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시고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 이분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표적과 기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오병이어의 기적과 병자의 고침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그런 능력을 구합니다. 그런 능력이 나타나면 예수님을 잘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표적과 능력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표적과 능력들이 나타나면 더 큰 표적과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는게 인간입니다. 사람의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되는 것으로 가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표적과 능력으로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유일한 최종 표적은 결국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병 고치심은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기 위해 오신 생명이 되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병 고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에 갇혀서 영원한 죽음에 들어가야 할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구세주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세상에 자신의 거처를 두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벗어나는 것임을 서기관과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예수를 좇고자 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자는 죽은 자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비록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는 길이지만 하늘에 거처를 두는 영원히 사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비록 육신이 살아있다고 해도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죽은 자라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인 것입니다.

기존의 삶과 죽음은 육신의 생존 여부 또는 세상의 소유 등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것이 없는 형편에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 사람답게 사는 것도 세상의 것이 풍요로운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 기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죽은 자의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는 말씀과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말씀 뒤에 오늘 본문의 내용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는 믿음은 세상에서는 언제든지 죽을 자세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세상에서 데려가시겠다고 하신다면 이제 나의 영원한 거처로 돌아갑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의 고백이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위기의 순간에서는 항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게 됩니다. 이 사실을 풍랑을 보면서 죽을까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작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믿음을 내세우면서 풍랑이 불어도 예수님을 믿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4. 환난의 의미

그럼 이제 신자에게 풍랑은 어떤 의미로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풍랑의 정도에 따라 염려와 근심 걱정도 달라집니다. 작은 풍랑에는 잠깐 근심을 하겠지만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죽겠나이다라는 하소연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큰 풍랑에는 내가 죽겠나이다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을 것입니다. 즉 풍랑을 통해서 인간이 평소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풍랑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지만, 큰 풍랑에 대해서는 두려움에 빠지며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풍랑이 있음으로 인해서 평소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단지 세상에 자신의 거처를 든든하게 만들기 위한 기대였던 것이고,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풍랑을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러한 자신의 믿음의 현실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풍랑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의 현실을 보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은 살면서 수없이 많은 위기 상황을 직면합니다. 본인이 그 상황을 인식할 수도 있고,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본인이 알지 못한 가운데서도 수 없는 위기 상황이 내 자신을 스쳐 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자기 백성의 육신을 지켜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순간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막아주시는 방패막이가 아닙니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배였지만 풍랑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비록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풍랑이 피해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개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살려달라고 소리쳐서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다는 것 때문에 풍랑이 있어도 예수님을 찾아 도와달라고 외치면 예수님께서 모든 풍랑을 잔잔하게 해주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믿음이 작은 자라는 책망의 이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8:27)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생각을 이끌어 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으키시는 일들 그리고 그 일들이 되어지는 결과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생각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 생활입니다.

신자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크고 작은 풍랑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풍랑을 만나면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이 그 풍랑을 잠재우셔서 자신이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수많은 풍랑이 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란 세상에 거처를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은 생명의 주로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함께 하심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에 마련된 자신의 거처로 평안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세상의 거처도 죽음의 위기에서까지 평안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위기에서도 평안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믿는 믿음이 곧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영원한 거처는 예수님입니다.

 

( 말씀 복습하기 )
 

1.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인 우리가 항상 불안해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그들이 가진 믿음에 대한 염려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오늘 본문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과 시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오늘 본문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이 작다고 책망을 듣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작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6. 마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작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7.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작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오늘날 신자들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와 멀어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죽은 자의 방식으로 보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신 삶과 죽음의 정의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본문을 통해 알게 되는 신자의 고백과 믿음은 무엇이며 또 풍랑으로 인해 두려워 하는 제자들을 통해 보여 주는 믿음이 작은 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1.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삶 가운데 풍랑이 있게 하시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2. 하나님 보시기에 큰 믿음은 무엇이라고 하며 또 그런 자들의 영적 생활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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