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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귀신 들린 돼지 떼

본문 / 8:28-34

 

1. 유대인의 메시아사상

메시아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악과 불행이 가득한 지금의 세계를 심판하고, 정의와 행복을 약속하는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구세주가 나타날 것으로 믿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문명권에나 종말관 및 메시아사상은 있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시대를 혼탁한 말세로 보고, 이를 구해줄 메시아를 기다리며 천국이 열리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조선 왕조 때 정씨 성을 가진 구세주인 정도령이 조선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왕이 된다는 내용이 기록된 정감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이런 메시아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메시아도 아니면서 스스로를 메시아라 일컬으며 나를 좇으라고 외치는 것은 유대인들의 시각에는 사람들을 속이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선동으로밖에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철저한 메시아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던 유대인들이 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까?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메시아사상을 유대교의 영광스러운 왕관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보석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은,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벌써 정상적인 일이 아니요, 민족을 배반하는 것이고, 원수의 편에서는 일이며, 지난 수 천년 간에 걸쳐 지켜 온 조상들의 명예를 모독하는 것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신약성경은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거짓 독설로 가득 찬 반유대주의 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아사상이 그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이 여러 가지로 분류되겠지만, 주된 메시아사상은 다윗왕국의 재현입니다. 다윗 시대와 같은 경제적 풍요, 사회적 정의, 평등, 평화 이런 것들을 재현할 왕으로 그리고 이방 민족들을 굴복시키는 강한 왕으로서 샬롬을 이루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이러한 메시아사상은 다윗이 죽을 때에 그의 씨 하나를 일으켜 다윗의 왕위를 잇게 하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이라고 하신 나단의 예언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기것은 사무엘하 7장에 보면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7:12-14)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 사상은 또 제2의 모세 사상으로도 나타납니다. 유대인에게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광야에서는 만나를 주고, 물을 제공해 주는 등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고 국가를 이루어 살도록 한 위대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제2의 모세와 같은 인물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출생의 배경부터가 그들이 기다리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고 예수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는 커녕 자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처참히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기 때문에 오늘까지도 유대교적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가 메시아일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복음서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1:1)는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이 기대하는 예수는 없다

유대인의 메시아사상에 대해 먼저 길게 말씀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실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이라는 시각으로 본다고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단지 귀신을 쫓아낸 내용으로만 되어 있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특이하게 귀신이 예수님께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8:31)라고 부탁을 했다는 점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모두 몰살함으로써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될 것임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의 부탁을 들어주셨다는 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을 먼저 생각해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의 결론이 결국 주민들이 예수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하는 예수님에 대한 배척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산상수훈을 말한 것은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의 나라는 잘못된 것임을 언급하고자 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아 나라는 강력한 다윗왕국의 재현이었습니다. 이러한 나라를 이루는 일에 예수님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기다리는 강력한 다윗왕국을 재현하는 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도저히 미치지를 못하고 결국 불의한 자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자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모든 불의를 깨끗하게 해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산상수훈을 보면서 도무지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의 현실을 보게 하시고, 그 현실에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보게 하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 다음에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생명이신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예수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우리의 마음에 있는 예수님을 성경에서 만남으로써 기뻐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와 다른 예수여서 외면하고 배척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환난이 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대하는 것은 자신이 만난 환난이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유익, 내 인생의 평안,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입니다. 유대인의 메시아사상과 결코 다르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환난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십니다. 병 고침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신 권세 있으신 분입니다. 이처럼 권세 있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다스려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고 말씀하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죽은 자는 누구인 것입니까? 오늘 본문 28절을 보면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8:28)고 합니다. 여기 보면 귀신들려서 몹시 사나워서 아무도 그들이 있는 길로 지나갈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이 죽은 자인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귀신들린 이 사람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결국 깨끗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자는 아닙니다. 도리어 오늘 본문의 죽은 자는 죽은 돼지 떼가 아까워서 예수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귀신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권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로 인해서 자신들의 재산에 큰 손해가 있게 된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죽은 자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귀신의 요구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돼지 떼가 죽지 않았다면 그들은 분명 많은 재산을 불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수가 나오지 않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이천 마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천 마리의 돼지라면 적은 재산이 아닙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분명 예수님으로 인해서 큰 손해를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서 귀신 들려 죽은 자로 사는 것과 돼지 이천 마리를 잃은 것 중 어느 것이 더 크고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까? 아마 머리로는 죽은 자로 사는 것이 더 크고 심각한 문제라고 하면서도 마음은 이천 마리라는 많은 재산을 잃는 것을 더 크고 심각한 문제로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풍랑도 잠잠케 하는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는 관심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함께 함으로 인해서 경제적인 풍요와 환경적인 평안을 누리고 싶어 할 따름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괴롭게 하고 재산상 손해도 보게 하는 예수는 배척의 대상일 뿐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예수와의 관계는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쫓아낸 사람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시내로 가서 귀신 들린 사람의 일과 돼지 떼의 일을 말합니다. 귀신들려서 몹시 사나워 그 길로 갈 수 없게 만들었던 사람이 고침받은 일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귀신을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자신들이 입은 재산의 손해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재산에 손해를 주는 예수는 필요 없다며 밀쳐 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그토록 믿었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죽은 자들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불신자보다 더 의로워지거나 거룩하고 착한 행동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란 죽은 자인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원히 살게 되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잃는다고 해도 또 어떤 괴로움이 있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뤄 주기를 원하십니까? 저주에 갇힌 불의한 나를 깨끗케 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일은 우리에게는 이미 이루어진 것입닏자. 단순히 천국 간다는 것을 넘어서 생명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는 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돼지 떼를 잘 키워서 많은 재산을 늘리겠다는 것은 죽은 자의 일일 뿐입니다. 그러한 죽은 자의 일은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나 어울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이신 예수님의 나라, 산자의 세상에서 어울리는 것은 죽은 자인 나를 살리신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그 나라에 어울리게 사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마태는 오늘 본문에 등장인물로 귀신 들렸지만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로 정신이 온전하여 진 자와 그 사람들 안에 있었던 귀신들이 들어가 물에 빠져 죽은 귀신 들린 돼지 떼 그리고 그 벌어진 상황을 보고 생명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보고 자신들에게도 생명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재산상의 손해만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마을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는 마을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귀신들린 돼지 떼나 재산상의 손해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동급인 것입니다. 귀신 들린 돼지 떼가 물에 빠져 죽듯 생명이신 주님을 거부한 그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의 형편이 그렇게 귀신들려서 살아가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의 “1.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5:1-2)고 하는 말씀과 누가복음 8장의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8:26-27)는 말씀은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귀신들린 자를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8:28)고 하여 귀신들린 사람을 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는 것이 마태복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신명기 19장의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19:15)라는 규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의 세상도 자신의 실체를 안다면 생명이신 주께 생명을 구하여야만 하는데 오늘 본문의 마을 사람들처럼 자신들이 귀신들린 형편을 모르기 때문에 오직 세상의 부요와 명예와 성공만을 구하며 사는 것은 이 세상이 귀신 들렸음을 고침받은 두 사람을 증인으로 세워 고발하고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귀신 들린 이 세상에 주님으로 고침받은 증인된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예수님은 경제적인 풍요나 인간의 소망을 채우는 메시아가 아니라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심이 곧 생명이고 복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자는 예수님을 아는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될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참된 구세주로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며 또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2.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가 예수님의 활동 전에 먼저 산상수훈을 낲에서 먼저 언급한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의 믿음이 유대이들이 가졌던 메시아사상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으로 죽은 자는 누구라고 하며 왜 그런 것입니까?

 

5.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으로 심각한 것과 또 우리가 보기에 심각한 어떻게 다릅니까?

 

6. 오늘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신자란 어떤 존재라고 말씀합니까?

 

7. 죽은 자의 나라와 우리 주님으로 세워진 생명의 나라에 어울리는 삶과 모습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8. 같은 사건과 내용임에도 마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기록한 내용은 무엇이며 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합니까?

 

9. 오늘날 세상이 귀신들렸음을 고발하는 증인은 누구이며 또 그 증인들이 전해야할 복음은 무엇입니까?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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