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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죄인을 부르는 예수님

본문 / 9: 9-13

 

1. 은혜란 무엇인가

교회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기쁨을 누리는 것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말씀에서 은혜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교회를 찾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동일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은혜 받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 받는다는 것을 본인의 감정적 상태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해 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 은혜가 된다고 하고, 설교가 은혜가 된다는 말을 하지만 그 말의 대부분은 자기감정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찬송을 부르면서 기분이 좋아지거나 눈물이 나는 것 등을 우리는 은혜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설교도 다르지 않습니다. 설교의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되어 공감이 되거나 여러 가지 우스갯말로 인해서 실컷 웃고 난 다음의 기분 좋은 상태를 은혜받은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은혜는 은혜가 아닐뿐더러 말 그대로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마약처럼 순간의 기분 좋음으로 끝날 뿐이기 때문입니다.

룻기서 2장에 보면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2:13)고 말합니다.

이 말씀 앞의 내용을 보면 이방 여인인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을 때 그것을 본 보아스가 룻에게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2:8)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룻이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2:9)라고 말하고, 이에 대해 보아스가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2:12)고 말합니다. 그리고 룻은 보아스의 이 말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고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즉 은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말이 룻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는 이방 여인이라는 자신의 처지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할 수 없는 룻을 보아스가 여호와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온 자로 여기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 없이 여겨주는 것을 룻은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즉 룻에게 있어서 은혜는 단순히 곡식을 마음대로 줍도록 한 것이 아니고, 양식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기쁨 때문도 아니라 보아스의 하녀보다 못한 이방인인 자신을 받아 준 것에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룻처럼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늘의 좋은 것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곧 은혜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를 이러한 참된 은혜의 상태로 이끌어갑니다.

 

2. 죄인과 함께 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가치관과 보편적인 상식, 그리고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는 도무지 일치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지만 세상의 상식과 윤리의 시각으로는 분명 죄인보다는 의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해야 맞고, 의인이 더 우대를 받고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기도 합니다. 대신 죄인에게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이 통상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는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걷기 위해 유대의 로마 총독이 세운 사람입니다. 자연히 세리는 강제적으로 세금을 걷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에 유대 사회에서는 상종도 하지 못할 아주 악한 인간으로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죄인도 유대 사회의 도덕적 규범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적 규례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때문에 이들 유대인들에게는 세리나 창녀와 같은 사람은 가장 큰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로 세상에서 무슨 선한 짓을 해도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신명기 23장의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23:18)는 말씀이 근거가 되어 성전에서의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는 저주받은 신분의 사람으로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단지 같은 자리에서 밥을 함께 먹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관계에서의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부정한 자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의 식탁에도 부정한 자가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저주 아래 있는 자로 간주하는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9:11)라고 의아해하며 물은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말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9:12)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9:13)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의사는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는 말씀은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만, 뒤에 나오는 긍휼과 죄인이라는 말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1장에 보면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21:17)는 규례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육체의 흠이라는 것은 단지 신체장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20절에 보면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21:20)라고 하는 말씀처럼 육신의 병도 포함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제사장 가문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갈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육신이 흠이 있거나 병이 있는 경우입니다. 즉 건강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병든 몸이라면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병이 낫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건강을 되찾는 문제가 아니라 제사장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원에 대한 말씀 뒤에 예수님은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구약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서 6장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은 제사는 필요 없으니까 행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애를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하나님의 인애, 즉 긍휼을 알지 못한 제사는 제사가 아니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제사장을 앞세워 제물만 바치면 제사가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제사만 드리면 자신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몰랐던 것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병든 자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육신은 건강하나 그 영혼은 병들었고 흠이 있는 상태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더욱 세부적으로 만들어서 철저하게 지키고 실천하는 삶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야말로 의롭고 건강한 상태에 있는 거룩한 백성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은 자신을 불쌍히 여김받아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자신이 불쌍히 여김받아야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 즉 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3. 죄인임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예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난 의인이다라고 할 사람은 교회에서 교주로 행세하고 싶은 목회자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사이비를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자신을 의인으로 지칭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독할 정도로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정당함으로 삼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긴다고 해서 예수님께 죄인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죄인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불쌍히 여김받아야 할 죄인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로 나오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 마태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신 것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과 그에 대한 바리새인의 반응과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세리였던 마태에게 그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죄인인 자신을 부르셨음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평생토록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신은 불쌍히 여겨주심을 받아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가 평생 신앙의 길을 가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곧 나는 불쌍히 여김받아야 할 존재이고 병든 자일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룻에게처럼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위로고 기쁨이며, 천국에 대한 말씀들 또한 힘과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의인은 부르심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에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오히려 천국에 가야 맞는데 왜 천국은 그들을 거부할까요?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의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는 의인은 자기 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행한 것을 의로운 신앙 행위로 여기면서 그 의를 근거 삼아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의인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불쌍히 여김받을 대상으로 보지 않기에 자연히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에는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항상 자신의 정당성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너에 비해 나는 정당하다는 이 속성을 인간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인이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이 속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신을 자신도 모르게 정당하게 여길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수시로 나의 죄를 보게 하고, 나 또한 불쌍히 여김받아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하셔서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 신자로서 그 긍휼을 가지고 형제를 대하도록 일하십니다. 교회는 단지 인간관계로 이루어진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는 백성들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이 교회에서 나타나고 증거되어야 할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은혜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은혜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바르게 알지 못할 때 발생하는 잘못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성경이 롯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는 은혜의 상태는 어떤 것이며 또 그 은혜는 어떤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고 합니까?

 

3. 예수님의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이 세상의 상식과 윤리의 시각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에수님이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제사장 가문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갈 수 없는 경우는 무엇이며 또 그런 경우의 제사장이 간절할 수밖에 없는 내용과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의 참 의미는 무엇이며 유대인들의 왜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고 합니까?

 

7. 신자가 예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8. 마태를 부르신 주께서 가장 먼저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과 그에 따른 바리새인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 알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9. 신자인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잊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 위해 행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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