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월 22일 / 마태복음 60. (마 9: 14-14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by 관리자 posted Feb 2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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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본문 / 9:14-17

 

1. 유대인들의 문제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온갖 상식들과 격식들을 무너뜨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나,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으신 것, 또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유대인의 금식일에 모든 사람들이 금식하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으신 것 등이 격식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복음으로 인한 자유의 의미도 모른 채, 단지 외적인 격식이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복음의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뭐든 자신이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하는 것을 자유라고 여기고, 누구든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라고 하면 복음이 아니라고 하면서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복음의 자유를 누렸던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고 하여 자신을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한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행동했습니다. 또한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바울이었지만 율법 없는 자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자유였습니다. 즉 복음의 자유는 격식과 형식을 무너뜨리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매어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개혁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당시 격식에 매어 있던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고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격식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신 것으로 말하면서 예수님을 개혁가로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개혁을 이루신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교회의 여러 가지 제도와 격식들을 없애거나 수정함으로써 교회를 교회답게 개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격식이나 형식에 매이지 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행동하라거나, 격식과 형식은 모두 외적인 것이니 지킬 필요가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금식에 대해서도 금식일을 정해서 금식하는 것은 모두 종교적인 형식에 불과하니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오히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9:15 )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격식이나 형식을 버리고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격식과 형식을 지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격식과 형식이 자신들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거룩한 자가 되게 한다고 믿었던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믿는 믿음에 두는 것이 아니라 격식과 형식에 둠으로써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으로 인해서 누리는 신자의 참된 기쁨과 사랑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 그들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금식의 문제를 통해서 이러한 우리 문제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비유의 의미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다면서 비방을 합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가지고 마가복음 2장에서는 비방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다만 사람들이라고만 말하고, 누가복음 5장에서는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이 비방을 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요한의 제자가 비방을 한 것으로 정확하게 말합니다. 이처럼 요한의 제자가 비방을 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구약의 완전한 종식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불리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어린양을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의 문제로 예수님을 비방했고, 예수님께서 지금은 혼인집 신랑이 함께 하고 있는 때이기 때문에 슬퍼할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즉 마태는 요한의 제자가 예수님을 비방한 것으로 말함으로써, 예수님이 오신 지금은 격식과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게 된 새 시대의 새로운 교제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혼인집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이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쁨의 조건은 충족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함께 하는 이 기쁨을 금식이라는 규례와 격식으로 인해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비유에 담아서 말씀합니다. 결국 비유는 구약적 사고에 의한 격식과 형식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새로운 교제 관계에서의 기쁨을 놓쳐 버리는 현실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먼저 오늘 본문의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9:16)라는 말씀은 그 당시의 천의 상태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지금처럼 천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고 화학섬유가 없이 모두가 자연섬유였습니다. 때문에 빨면 천이 줄어들었고 몇 번을 빨아야 비로소 줄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여서 빨게 되면 생베 조각이 줄면서 주위의 낡은 천을 당기게 되고, 결국 낡은 옷은 당기는 힘에 의해서 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9:17)는 말씀은 낡은 가죽 부대의 상태를 이해하면 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너무 낡아서 곧 터질 것 같은 부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곧 터질 것 같은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목축을 하였기 때문에 양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 꿰매서 포도주를 넣는 부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죽으로 된 부대가 오래되면 가죽의 특성인 신축성이 사라지고 뻣뻣하게 됩니다. 그러한 부대에 발효가 끝나지 않은 새 포도주를 넣게 되면 결국 낡은 가죽 부대는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발생한 가스로 인한 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전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먼저 낡은 옷이나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인들이 대대로 지켜오던 구약적 규례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할례를 행하고 제사를 행하고 절기를 지키는 제도와 격식을 통해서 자신들이 보전된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들을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예수님은 옛 시대, 즉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제는 제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이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유대인의 규례 아래서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하심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금식하는 자신을 하나님의 규례를 잘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시각으로는 자신을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죄인에게 함께 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새 시대의 기쁨은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는 기쁨은 저주에 갇힌 자신의 실상을 알았을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제도나 격식, 형식을 잘 지키고 따르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저주에 갇힌 자라는 것을 잊는 것이 곧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는 것이 되고, 제도나 격식,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자신을 보지 않고 저주에 갇힌 자기 실상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함께 하심이 생명임을 안다면 그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도나 형식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없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기쁨이신 예수님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는 기쁨은 세리와 창기들처럼 죄인들만이 실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리와 창기 같은 사람을 죄인으로 바라보면서 규례나 종교의식을 잘 지키고 행하는 자신들을 보면서 자신들은 죄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지를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수많은 종교의식과 제도, 격식과 형식, 행사에 파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사업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자신을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참된 신자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복을 기대하게 됩니다. 참된 신자로 살아가는 나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다라는 헛된 기대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낡은 옷이며 낡은 부대인 것입니다.

이러한 낡은 사고방식으로는 죄인에게 함께 해주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는 은혜와 기쁨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교회 일에 열심인 자신을 스스로 신앙적으로 건강하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죄인에게 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로 인한 기쁨은 상실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 열심이 있고, 종교의식에 부지런히 참석을 하고, 더 많은 수고와 노력과 열심을 행한다 해도 그러한 것으로 깨끗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의식적인 것들이 우리를 의롭게 하거나 그것으로 신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예수님이 아니면 영원한 저주에 갇혀야 할 죄인이라는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말 그대로 기쁜 소식, 즉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에 해당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금식일을 정해서 금식한 것을 그러한 열심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령 신자가 하루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께 규칙적으로 기도하거나, 일정한 양을 정해서 성경을 보는 것 등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신앙 행위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9:15 )고 하시면서 금식이 예수님과 연관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요엘서 2장에 보면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2:12-13)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금식은 단지 밥을 먹지 않음으로써 육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마음의 애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의 애통을 신랑을 빼앗김으로써 발생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누가 신랑, 즉 예수님을 빼앗겼다는 것으로 애통하겠습니까? 그들이 바로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기쁨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빼앗긴 것으로 인한 애통이 없는 상태의 금식은 단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시면서 예수님을 빼앗기고 잃은 경우가 없습니까? 세상이 내 속에 파고 들어오고, 예수님보다 세상이 더 크게 보이고 예수님보다 세상의 것을 잃는 것이 더 두렵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잃은 빼앗긴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자신에 대해 애통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인된 나에게 함께 하신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무엇을 한들 그 모두는 형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의 기쁨은 자신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겨주시고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기쁨을 우리가 행하는 종교의식이나 형식에서 누리려고 한다면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면류관이고 영광이고 상이고 복입니다. 그런 예수님만이 오늘 우리의 기쁨이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에 대한 바른 의미를 오해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성경이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정한 자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주께서 격식과 형식을 폐하려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격식과 형식으로 말미암은 문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마태가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금식의 문제로 비방하는 자들의 정체를 요한의 제자라고 분명하게 밝힘으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6. 예수님께서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 격식과 형식을 잘 지키는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는 것은 무엇이며 또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9.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신랑을 빼앗김으로 말미암은 참된 금식과 형식적인 금식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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