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6,222,847
오늘 : 9,715
어제 : 4,394

페이지뷰

전체 : 91,597,899
오늘 : 99,853
어제 : 88,841
조회 수 8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추수할 일군을 보내소서

본문 / 9:27-38

 

1. 누가 불쌍한 사람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서 나는 불쌍한 존재다라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딱하고 어려운 형편과 처지에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불쌍하다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넉넉하게 사는데 자신은 돈 때문에 힘들어 할 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은 좋은 남편 잘난 자식 때문에 웃으면서 사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할 때 나는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형편이 넉넉하고 가족관계에서도 힘든 일이 전혀 없이 평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을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불쌍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눈이 없이 타인을 불쌍하게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단지 외적인 조건이 기준된 평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평가위에서 동정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소경이 등장을 하고 그들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소경은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소경만이 아니라 32절에 나오는 귀신들려 벙어리 된 사람 역시 우리 입장에서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인해 고통을 겪은 여인도 불쌍한 사람이고, 문둥병이 들린 사람도 불쌍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앞에 예수님이 서 계시다면 예수님 앞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간청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내 자신이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을 때 가능한 말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불쌍하다는 것을 환경적인 요인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우리는 불쌍한 사람의 범주에서 자신을 제외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사로와 부자를 비교한다면 그들 중 누가 불쌍한 사람입니까? 환경적인 요인으로 본다면 누가 뭐래도 거지 나사로가 불쌍한 사람이고 부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평가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하는 내세의 결과를 두고 본다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멸망의 세계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할 부자가 불쌍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소경이 예수님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는 내용에서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다른 시각의 불쌍함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소경이 어떤 의미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든 마태는 소경의 말을 통해서 진심으로 불쌍한 자가 누구인가를 말하고자 한 것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에 보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9:36)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무리들이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눈이 밝아진 소경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온 땅에 퍼뜨립니다. 그리고 귀신들려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말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본 무리가 놀라면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9:33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9:34)라는 말로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고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조차도 오히려 예수님을 거절하고 대적하는 형편에 있음으로써, 참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받지 못하는 그것이 예수님이 보실 때 불쌍한 것이었습니다.

 

2. 지금은 추수의 시기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이어서 오늘 본문 37절부터 보면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9:37-38)고 합니다. 이 말씀은 위의 내용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가 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추수의 시기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추수하는 목자로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추수하는 자로 보내심을 받았고,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일에 참여할 자, 즉 추수하는 일군으로 부름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불러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셔서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시며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추수할 일군을 보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로는 숫자가 부족해서 더 보내 달라는 의미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아닙니다. 또한 어차피 제자들을 보내실 생각이시라면 추수할 것은 많고 일군은 적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을 훈련시켜서 추수할 일군으로 보낼 것이니까 기도로 준비하라고 하시는 것이 더 타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이 아닌 다른 일군을 더 보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 자신을 추수할 주인인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 헌신할 일군으로 세워달라고 소원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추수는 단지 곡식을 거두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곡식을 거두어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여 알곡은 창고에 넣고 가라지는 불에 태워버립니다. 이것이 추수의 전부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13:38-40)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추수는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것이 세상의 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신 지금이 추수의 시기라면 이 세상은 이미 세상의 끝에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의 추수의 일에 세움을 받은 일군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하라고 하신 기도는 오늘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를 위한 일군을 많이 보내 달라는 그런 기도는 아닙니다. 전도에 능력이 있는 일군을 따로 많이 보내 달라는 기도를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내 자신이 추수의 일군으로 부름 받은 사람답게 추수를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일치된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을 추수의 일군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채 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혼자 천국 가라고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부르시고 신자 되게 하신 뜻이 그것뿐이라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구원을 주기로 예정된 사람들을 죽기 직전이나 죽은 후에 구원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부터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한 이유는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추수 작업을 위한 일군으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의 생활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뜻에 마음을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추수 작업을 하고 계시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3. 추수할 일군

그러면 신자가 어떻게 하는 것이 추수의 일군으로 사는 것이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추수를 곡식을 거두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추수할 일군의 의미를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믿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지금도 권세를 가지고 택한 자기 백성을 부르고 믿게 하시는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신자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택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믿게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15:24)고 말씀하시고 또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18:12)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오셨고,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십자가의 희생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추수의 일에 세움 받은 일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음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였으나 예수님이 자신을 찾으심으로 목자 되신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 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잃어버린 자도 아니었고 예수님이 자신을 찾았다는 감사함도 없는 그런 마음으로는 잃은 양을 찾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잃어버린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그들이 볼 때 잃어버린 자는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이며, 문둥병자, 소경, 귀신들린 자처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에 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볼 때 그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불쌍한 자들이었고,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끝에 서서 진심으로 무엇이 불쌍한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불쌍하다는 말의 참된 의미를 깨달으신다면 예수님이 참된 목자가 되셔서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그 모든 일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긍휼의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로 오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목자 없이 유리하면서 고생하는 불쌍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이 없어 고생하는 것이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힘들게 사는 것이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런 외적인 것으로 불쌍하다고 보기 때문에 육신의 것을 도와줌으로써 그들을 조금 낫게 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불쌍한 것이 목자 없이 유리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줄 것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진심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십자가의 죽으심을 안다면, 신자가 나타내고 증거할 것은 복음뿐이며 복음이 불쌍한 자를 구원할 능력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이런 마음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추수에 세움 받은 일군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람이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인식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오늘 본문에서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의 생각과 다른 불쌍함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 추수할 일군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와 또 추수는 무엇까지 포함된 것이라고 합니까?

 

4.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기도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이 기도하라고 하신 의미대로의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떤 내용이어야만 합니까?

 

6. 추수할 일군으로 사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성경의 말씀은 어떻게 다른 것이며 그 성경의 가르침은 무슨 내용입니까?

 

7. 바리새인들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그런 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떤 자라고 하십니까?

   

8.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으로 불쌍한 자들은 어떤 자들이며 또 그런 자들에게 진정으로 주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03 2026 3월 29일 / 마태복음 65. (마 10:11-15) 제자들의 전도 관리자 2026.03.29 13
902 2026 3월 22일 / 요한복음 106. (요 16:23-24) 구하지 말라 그리고 구하라 관리자 2026.03.22 49
901 2026 3월 22일 / 마태복음 64. (마 10:7-10) 보냄받은 제자의 삶 관리자 2026.03.22 53
900 2026 3월 15일 / 요한복음 105. (요16:19-22) 근심이 기쁨이 되리라 관리자 2026.03.15 69
899 2026 3월 15일 / 마태복음 63. (마 10:1-6) 제자들이 받은 권능 관리자 2026.03.15 36
898 2026 3월 8일 / 요한복음 104. (요 16:12-20) 성령이 오시면 관리자 2026.03.08 66
» 2026 3월 8일 / 마태복음 62. (마 9:27-38)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관리자 2026.03.08 83
896 2026 3월 1일 / 요한복음 103. (요 16:5-12) 보혜사 성령의 역할 관리자 2026.03.01 106
895 2026 3월 1일 / 마태복음 61. (마 9:18-26) 예수님의 생명의 세계 관리자 2026.03.01 107
894 2026 2월 22일 / 마태복음 60. (마 9: 14-147)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관리자 2026.02.22 165
893 2026 2월 15일 / 마태복음 59. (마 9:9-13) 죄인을 부르는 예수님 관리자 2026.02.15 152
892 2026 2월 8일 / 요한복음 102. (16:1-4) 알지 못하는 자와 아는 자 관리자 2026.02.08 140
891 2026 2월 8일 / 마태복음 58. (마 9:1-8) 마음의 악한 생각 관리자 2026.02.08 214
890 2026 2월 1일 / 요한복음 101. (요 15: 21-27) 보혜사 성령 관리자 2026.02.01 396
889 2026 2월 1일 / 마태복음 57. (마 8:28-32) 귀신 들린 돼지 떼 관리자 2026.02.01 192
888 2026 1월 25일 / 마태복음 56. (마 8:23-27) 풍랑과 믿음 관리자 2026.01.25 350
887 2026 1월 18일 / 요한복음 100. (요 15:16-20) 신자가 속한 나라 관리자 2026.01.18 379
886 2026 1월 18일 / 마태복음 55. (마 8:18-22) 예수님을 따르려면 관리자 2026.01.18 366
885 2026 1월 11일 / 요한복음 99. (요 15:11-15) 너희는 나의 친구라 관리자 2026.01.11 329
884 2026 1월 11일 / 마태복음 54. (마 8:14-17)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심 관리자 2026.01.11 43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46 Next
/ 46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