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월 3일 / 마태복음 69. (마 10:40-42) 신자의 가치와 할 일

by 관리자 posted May 0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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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자의 가치와 할 일

본문 / 10:40-42

 

1. 맘몬교의 충실한 교인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과 그리고 그 재산에 의한 소비 정도로 평가됩니다. 윤리적인 실천이나 양심적인 행동 따위는 전혀 대우받지를 못합니다. 예전에 경영권 불법 승계를 위한 배임 및 조세 포탈죄가 확정되어 징역형이 선고된 대기업 회장이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을 받았습니다. 이 일을 두고 많은 사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외치며 법치주의를 무너뜨린 행동이라며 대통령을 비난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강원 도민들은 반대로 이 대기업 회장의 대통령 사면을 환영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강원도 평창이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는 대기업 회장이 꼭 필요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대통령 역시 대기업 회장이 국익 향상에 그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특별사면을 단행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대통령은 법치주의의 확고한 확립보다는 국익에 더 가치의 무게를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통령이 국가를 경영하는데 있어서 무엇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가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국익에 비중을 둔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사면이 최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대기업 회장의 사면을 두고 무엇이 옳은가를 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확정된 죄도 사면받을 만큼의 힘이 무엇으로부터 나오는지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대기업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나옵니다.

윤리를 말하고 양심을 말하지만, 아무리 윤리적으로 살고 양심적으로 산다고 해도 세상의 돈과 권력은 대한민국의 법으로 확정된 죄까지도 사면하게 할 힘이 없습니다. 수많은 백화점이 대한민국의 1%에 해당하는 VVIP라고 하면서 극진히 대접하는 그들도 윤리를 실천하고 양심적으로 산 사람들이 아니라 돈의 소비 능력이 매우 큰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의 가치는 돈이 기준 되어 평가된다는 것 또 돈이 권력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윤리나 양심적인 행동이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킨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인 실천이 있고 양심적으로 산다고 해도, 돈이라는 힘이 없으면 윤리와 양심까지도 별 값어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시 돈이 최고라며 호주머니에 돈을 더 많이 늘리기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은 번영신학과 성공주의의 충실한 교인으로 살아간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영접하는 문제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실감을 해야 합니다. 번영과 성공이 가치라고 여기는 세계에서 진리나 영생이라는 말이 얼마나 가치가 없으며 비웃음을 살 수 있는 말인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신자된 우리에게 세상에서는 푸대접을 받고 힘이 되지 않는 진리를 안겨주고 그 진리를 증거하는 자로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이미 고난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시아로 인해서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민족으로 부상하게 될 것을 믿었고, 그 소망으로 로마의 압제를 견디어 왔습니다. 그들에게 진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진리는 율법이었고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의가 확보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이미 진리 안에 있고 의를 확보한 상태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하루속히 그들이 믿고 있고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실현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진리와 죄를 외치는 선지자가 등장한다면 환영받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은 핍박과 함께 배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선지자를 영접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40절에 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40)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예수님이 보내신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즉 제자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사람이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영접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에 나가서 제사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섬긴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영접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그 어떤 종교적인 의식을 동원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접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흔히 전도 주일이라는 것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온갖 수단을 다 써서 불러 모아 놓고 목사가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영접하기로 원하시면 손드세요라고 말하면 얼떨결에 손을 들고, 그러면 지금 손든 분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시므로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박수를 쳐 주는 모습들은 기독교도 아니며 교회도 아니고 단지 종교 놀이에 빠져 사는 어리석은 종교 놀이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제자를 영접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제자를 영접하면 그것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41절의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10:41)라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보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에 대해 말합니다. 상은 나중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이 무엇이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선지자나 의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만큼 신앙적으로 위기에 빠진 상태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시고 이스라엘로 보내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엉망인 신앙을 책망하면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뜻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이기 때문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은,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닫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선지자라는 한 인간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가 선포한 말에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자로 하나님께 나오게 되는 것이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이 됩니다.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선지자처럼 의인도 스스로 윤리를 실천해서 발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6:9)고 하여 노아를 의인이라고 일컬었는데,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의는 세상이 뭐라 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만드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의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고 하는 말씀과 같이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은 노아를 세워서 노아 시대의 악을 드러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노아에게 담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만약 누구든 노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말씀을 신뢰하면서 노아와 함께 방주는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면 그것이 곧 노아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나 의인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보내신 그 뜻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의인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가진 자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선지자와 의인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42절의 말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3. 제자의 참된 가치

오늘 본문 42절의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2)는 말씀에서 작은 자를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의미하는 것으로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작은 자를 그런 의미로 생각하면 42절은 결국 신자가 소외 계층의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고 섬기면 상을 받는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앞에 있는 40절과 41절의 말씀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해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럼 작은 자는 누구인 것입니까?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라고 말씀하는 것 때문에 마치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는 의미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41절의 말씀을 생각하면 작은 자는 제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제자의 이름으로 제자를 영접하는 자라고 해석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예수님은 그런 제자를 작은 자로 표현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2절의 그 사람이 의미하는 것은 6절에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6)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냄 받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은 그 보냄 받아 일을 열심히 한 제자가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제자를 영접한 그 사람이 받는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귀한 물 한 그릇을 주면서 대접하고 섬겼다고 해서 그 공로로 상을 받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에게 냉 수 한 그릇을 주는 것입니다.

제자의 이름이라는 것은, 선지자의 이름, 의인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의해서 발생한 이름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 되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잃어버린 양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목자 없이 유리하는 불쌍한 존재이기에 참된 목자에게로 인도할 역할로 제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옷도 아니고 신발도 아니라, 오직 부정한 자를 깨끗케 하시고 귀신들리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는 하늘의 긍휼과 자비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은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하늘의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는 그 일을 위해 보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가치였습니다. 긍휼과 자비를 아는 자로 존재함으로써 잃어버린 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깨닫고 그래서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로 나오게 하는 것이 제자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를 돈이 기준이 된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늘의 가치를 기준으로 해서 바라본다면 그들은 작은 자가 아닌 것입니다. 즉 세상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다만 진리 하나로 존재하는 신자를 작은 자로 취급하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신자로 말미암아 하늘의 상에 참여하는 백성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고 합니다. 여기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으로 소개합니다. 사신은 국가의 왕을 대신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신이 말하는 것은 곧 왕의 뜻과 같은 것이고, 사신의 말에 동의한다면 왕의 말에 동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신을 배척한다면 그것은 사신이 속한 나라를 배척하고 왕을 배척하는 것과 같이 취급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말처럼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이나 삶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권능을 주셨는데, 그 권능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아는 것이라는 것이 마태복음 10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리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26절의 말씀처럼 윤리적인 삶이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은 비밀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은 비밀한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알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담긴 용서의 은총이며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신자는 바로 그 비밀을 간직한 자로 세상에 보냄 받았고, 그 비밀한 것을 증거할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치입니다. 이 가치를 세상의 가치관에 눈이 멀어 우리 스스로 무시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의 길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눈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불쌍하게만 보입니다. 과연 그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이러한 신자가 세상에 빛과 소금인 것이고, 그러한 신자가 증거하는 바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늘의 선지자와 의인의 상, 즉 선지자나 의인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자는 다시 보냄을 받고 또 그 신자를 다시 영접하고 부름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상을 받은 자로서 또 그 상을 받을 자를 찾아 복음을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존재하는 이유이며 목적인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이 세상은 무엇이 힘인 곳이며 또 그런 세상에 존재하는 교인들 역시 무엇에 충실하게 살아간다고 합니까?

 

2. 주께 보냄받은 신자들이 이미 고난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선지자를 보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4.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노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선지자나 의인은 어떻게 만들어진 자들이며 또 그들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7. 오늘 본문 42절에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베풂을 받는 이 작은 자는 누구이며 또 상을 받을 자는 누구라고 합니까?

 

8. 제자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하며 또 제자의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가치는 무엇이며 또 신자의 일은 무엇입니까?

 

10. 하나님의 복음과 신자들이 끊이지 않고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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