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5월 31일 / 마태복음 72. (마 11:16-19) 신앙과 놀이

by 관리자 posted May 31, 20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신앙과 놀이

본문 / 11:16-19

 

1. 지진과 하나님

사람들은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초초해집니다. 한번 사는 인생이기에 뭔가 보람 있게 살다 죽어야 하는데, 살면서 남겨 놓는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이 세월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마치 세상을 헛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도 대지진과 같은 엄청난 재난 앞에서는 사치스러운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지 않은 지진으로 건물들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끔찍한 현실 속에서 과연 어떤 사람이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겠다는 느긋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재난에서 살아남은 것도 다행한 일이고, 지금 당장 하루를 사는 것이 급한 문제인 것이지 헛되지 않은 인생, 보람 있는 인생, 이런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은 이러한 재난으로 인해서 거의 폐허처럼 되어 버린 나라나 도시를 바라보면서 불쌍하다고 하고 동정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구호물자와 봉사자들이 그곳으로 달려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것으로 인생을 보람 있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재난으로 인한 대지진이 당한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인데 그곳을 돕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한쪽은 울고 있고, 다른 한쪽은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휴지 한 조각 내미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는 것이 재난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일본에서 큰 지진으로 스나미가 몰려와서 많은 사람들이 사상했을 때는 그래도 일본은 우상이 많은 나라니까 뭔가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중남미 국가인 아이티라는 나라에서도 큰 지진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샜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티는 80%가 로마 카톨릭이고, 16%가 기독교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쨌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전체의 96%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런 나라가 수십만 명이 사상하는 끔찍한 재난을 당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런 하나님을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재난과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감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까.

아마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십만 명이 사상하는 지진을 주시고는 그래도 나에게 예배하고 감사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그런 곳에 구호 물품을 보내고 봉사자들을 보내면서도 지진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하는 것도, 교회조차도 지진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지혜

오늘 본문 19절 끝에 보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1:19 )고 말합니다. 같은 말씀을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7:35)고 말씀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자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가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까? 이들이 자부하고 있었던 의를 의로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율법 실천에 힘썼던 자신들의 의가 인정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높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고 그들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것이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누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좇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 방식을 스스로 마음에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가 존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결과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지혜는 하나님의 자녀로 옳다함을 얻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옳다고 인정해줘야 옳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말한 대로 사람은 끝까지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의를 전혀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지혜가 옳았다는 것은 하나님 자녀가 있음으로 해서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사람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과 다르면 틀렸다고 하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틀렸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상대방을 틀렸다고 판단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합니다. 문구 하나를 내 세워서 트집을 잡고 결국 서로가 배척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교파와 교단은 거의 이런 방식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7:30)고 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아니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인간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요한을 자신들보다 잘난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자신들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때문에 세례를 요한이 베풀고 자신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요한이 중심이 되고 자신들은 겉으로 밀려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도 이러한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사람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도 십자가가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중심이 되는 것도 나를 높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 자리에 나와 있다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우리가 바로 지혜의 증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의 증거물은 교회도 세상도 그리고 내 이웃까지도 결코 내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이 세대의 현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주인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신 일입니다. 이 구절을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동원되지 않고 심심풀이로 장난삼아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재난으로 인한 지진도 하나님의 실수나 장난으로 하신 일이 그런 참사를 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혜로 행하신 지진으로 인해서 옳다 함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행하신 일에 잘못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지진을 주신 하나님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을 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상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역시 세상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의 일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신자도 교회도 지진을 일으키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지혜로 행하신 일도 옳다고 인정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선함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에 대해서만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신자들까지도 세상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을 행하신 하나님은 옳다고 하면서, 고통과 아픔의 일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반발하며 원망합니다. 이것이 세상과 함께 웃고 울며 살아가는 믿는 자의 현실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묻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요한에게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아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지혜의 일이 옳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또한 요한처럼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대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판단할 것이고, 결국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옳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대하며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오늘 본문 16절부터 보면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1:16-17)고 합니다. 이 비유를 많은 분들은 목사가 설교를 해도 반응하지 않는 교인들을 책망할 때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비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신앙의 실상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4. 신앙과 놀이

예수님의 이 비유를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놉니다. 피리를 부는 놀이를 하고 슬피 우는 놀이를 하는데, 피리를 부는 놀이는 결혼식 놀이고 슬피 우는 놀이는 장례식 놀이를 뜻합니다.

그런데 피리를 불면 다른 아이는 춤을 춰야 결혼식 놀이가 제대로 되고 재미있는데 춤을 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슬프게 울면 다른 아이는 가슴을 쳐야 장례식 놀이가 제대로 되는데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리를 불고 슬피 울면서 함께 놀자고 한 아이가 자기의 놀이에 함께 하지 않는, 즉 춤추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은 동무를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내용은 예수님이 천국의 복음을 전파해도 기뻐하지 않고, 죄를 책망해도 가슴을 치며 회개하지 않는 세태를 책망하는 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시고 죄를 책망하시며 결국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결코 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으시고, 죽음에 처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삶은 오직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오심이 한낱 놀이로 간주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놀이로 여기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생명보다는 세상의 복을 더 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위에 것을 주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땅의 것을 달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데려가고자 하시는데, 우리는 나의 길을 가겠다며 버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앙은 생명이 아니라 단지 놀이이며 취미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은 자임을 선포하는데, 우리는 살기 위한 길로만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고통이 되고 아픔이 되고 손해 되는 일이 주어지면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라며 원망만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종교 놀이를 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따라서 춤추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는다며 자신들의 놀이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 동무를 비난한 아이들은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놀이의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그것이야말로 신앙을 놀이로 간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자기들의 놀이에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부터 보면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1:18-19)고 말합니다.

요한은 광야의 선지자로서 다른 유대인이 먹는 것처럼 먹지 않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생활하였습니다. 입는 것도 달랐습니다. 그 생활이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귀신들렸다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 속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하지만 손을 씻고 먹어야 하는 유대인의 규례를 지키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죄인의 친구로 지낸다며 비난을 했습니다. 이 역시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고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보면 자신들의 놀이에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놀이에 함께 어울리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잘못됨을 드러내시고 신앙까지도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의 도구로 삼으려는 세태를 책망하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신앙을 자기 기쁨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예수를 배척하고 비난합니다. 예수라면 자신처럼 잘 섬기고 잘 믿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를 기준으로 해서 세상에 오신 참된 메시아를 판단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5. 지혜의 일을 옳다고 할 사람

세례 요한은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예수님의 일을 보고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에게는 요한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메시아의 일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을 듣고 보고서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것입니다.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일은 예수님이 흑암에 갇힌 자들에게 빛으로 오셨고, 사망에 갇힌 자들에게 생명으로 오셨음을 보여주는 지혜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지혜로 행하신 일을 보고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 기쁨을 위해 자기 놀이에 빠져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진을 일으키시는 일에 대해서도 이해를 못합니다. 인간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상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의 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또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고통과 아픔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지혜를 엿보게 됩니다. 고통스럽고 힘들고 아픈 것 때문에 견디기 힘들고 그래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나의 생명을 위해 지혜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이 옳았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신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하심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상식에 부합되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지혜로 행하신 일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신자와 구별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종교 놀이가 아닙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의 놀이에 어울려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피리를 불 때 예수님은 춤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슬피 울어도 예수님은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일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온통 놀이로만 가득합니다. 종교 놀이이고 교회놀이입니다. 기도원을 찾고 기도 응답받고 병 고치는 체험을 통해서 예수 믿는 맛을 즐기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귀를 닫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 일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지혜로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그 옳음을 알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지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서 지혜로 행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옳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을 세상의 주관자라고 하면서도 큰 재앙 앞에서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누가복음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이며 그 지혜를 반대하는 것은 무엇이며 왜 그렇다고 합니까?

 

3. 인간의 지혜를 반대하는 일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4.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지혜의 증거물인 까닭과 그런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앙까지도 하나님의 지혜로 행한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예수님이 허락하신 신앙과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종교 놀이)은 어떻게 다릅니?

 

8. 오늘 본문에 의하면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종교 놀이는 어떠한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합니까?

 

9. 예수님이 병자를 고침으로 보여주고자 한 일은 무엇이며 또 요한이 그 일을 듣고 오히려 의문을 갖게 된 까닭과 그리고 그런 일이 우리와 어떻게 관계가 됩니까?

 

10.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자들이며 또 그들과 세상의 구분은 어떻게 드러난다고 합니까?

 

 
 

Articles

7 8 9 10 11 12 13 14 1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