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7월 5일 / 맥추감사주일 / (롬 8ㅣ22-27) 우리를 위한 성령의 탄식

by 관리자 posted Jul 0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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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를 위한 성령의 탄식

본문 / 8:22-27

 

1. 오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지체라는 관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체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이 세우신, 성령의 피조물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는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에 관심을 두며 우리를 확인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2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성령이 탄식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대개 보면 성령이 탄식하신다는 것을, 신자의 신앙이 연약하여 신앙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시면서 신앙이 강한 신자가 되도록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신다는 뜻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으며 모순이 따르게 됩니다. 만약 성령이 우리가 연약한 것을 돕기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면, 하나님은 분명 성령의 기도를 들어주셨어야 하고, 그렇다면 모든 신자의 신앙은 강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의 신앙이 연약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성령의 간구하심이 하나님께 응답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기도도 듣지 않으셨다는 모순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연약함을 세상의 힘든 일로 인해 낙심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기도도 하지 않게 되고, 교회 생활에도 마음이 멀어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신자의 연약함에 해당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언급하고자 하는 연약함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연약함

사도가 말하는 연약함이 무엇인지는 앞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8:24-25)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생각해 본다면, 사도가 말하는 연약함은 보지 못하는 것을 참음으로 기다리지 못하는 것을 두고 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소망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23절에서는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23)하여 우리 몸의 속량임을 말씀합니다.

우리 몸의 속량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성취됩니다. 부활하여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때 우리는 완전한 몸의 속량을 받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몸은 단지 육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몸의 속량은 죄에서 완전하게 벗어나 하늘의 생명에 속한 자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신자에게 있어야 할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해진 시간 약속이 없는, 한마디로 기약이 없는 소망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이 소망을 가볍게 여기게 되고,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참으며 기다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이러한 연약함을 깨닫는 신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탄식입니다.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연약함은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로 보는 것을 좇지 않고, 보지 못하고 기약도 없는 소망을 바라보며 참음으로 기다리는 믿음의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힘쓰면 힘쓸수록 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나약함만 보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확인하면서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함께 한 성령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다시 말해 연약함으로 인한 신자의 탄식은 신자의 종교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탄식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탄식인 것입니다.

물론 보이는 것을 좇아 사는 사람도 탄식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탄식은 모두 보이는 것으로 인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남들만큼 없다는 것이 탄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것을 좇는 욕망에 붙들려 살아간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세상은 보지 못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세상도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소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망이 되는 그것을 기다리는 참음이 없어서 보는 것을 좇게 되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탄식을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같은 탄식이야말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탄식을 나와는 상관이 없는 별개의 문제로 여길 수 없습니다. 나는 연약함에 대해서, 내 신앙에 대해서, 보지 못하는 소망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보는 것을 좇아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성령이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탄식을 하고 간구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의 탄식은 말 그대로 성령의 탄식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여전히 보는 것을 좇아 산다면 결국 성령이 간구가 실패했다는 논리도 가능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은 곧 성령 받은 신자의 탄식입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에 우리를 끌어들였기 때문에 나오는 탄식이고 그것이 성령의 탄식에 일치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의 탄식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성령님은 아주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성령을 열광적인 신앙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곧 열광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나 찬송을 할 때 조용하면 소극적인 것이고 그것이 성령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령을 열광적인 모습으로 연결하게 되면, 개인적인 신앙체험이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든 상관없이 자신의 체험만을 주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셔서 그를 새롭게 하고, 성령의 피조물이 되게 하여, 성령에게 소유된 사람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에게 소유된 성령의 피조물로 살아가는지 아닌지는 연약함에 대한 탄식이 있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좇아 사는 것은 분명 육을 좇는 것인데 그러한 자신을 보면서도 탄식이 없다는 것은 전혀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기 연약함에 대해 사도와 같은 탄식과 한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성령이 피조물로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회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채 오직 교회가 눈에 보이는 성장하는 것만을 신앙의 강함으로 인식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 역시 복을 받고 잘 사는 것을 신앙의 강함의 결과로 인식을 합니다. 이런 사람의 탄식은 교회가 성장하지 않을 때 나오는 것이고 또 남들보다 세상의 것, 즉 보이는 것들을 더 많이 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이는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믿음에서 벗어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8:24)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이 소망인줄 알고 좇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탄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보지 못하는 것이 소망임을 알면서도, 참된 소망을 참음으로 기다리며 따라가지 못하고, 항상 보이는 것에 굴복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보면서 탄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의 탄식은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에 피 흘려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탄식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탄식과 함께 참된 소망은 주께 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탄식 안에서 그리스도의 용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닫기 때문에 용서의 주가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연약함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탄식이 있습니까? 그 탄식이 바로 성령의 탄식임을 기억하여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의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1-39)

여기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하는 것들에 대해서 35절부터 보면 환난(고난), 곤고(행동이 제한된 상태/ 옥에 갇힘), 박해, 기근, 적신(헐벗음), 위험이나 칼이라고 하며 또 38절 이후에는 사망, 생명, 천사, 권세자, 현재일, 장래일, 능력, 높음, 깊음, 피조물 등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37절에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39절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의 견인뿐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근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게 하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어떤 환경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이 사실이 믿어지는 자라면 이기고도 남는 자이며, 그분의 사랑에 매여 살아가는 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말씀에서 교회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 성령의 탄식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해석은 무엇이며 또 그 해석에 대해 무리가 있다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우리의 생각하는 신앙의 연약함과 바울이 말하는 연약함은 어떻게 다릅니까?

 

4.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된 신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 내용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5. 인간의 탄식과 성령의 탄식은 어떻게 다르다고 말씀합니까?

 

6. 성령의 탄식을 신자인 나와 상관이 없는 별개의 문제로 여길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우리가 생각하는 성령에 대한 왜곡된 해석은 무엇이며 또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은 존재로서의 증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성령의 탄식은 우리를 어떠한 자로 세운다고 합니까?

 

9. 로마서 8장의 바울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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