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루신 예수님
본문 / 요19:28-30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시는 장면입니다.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다 당하시고 비참한 몰골로 사람들마다 고개를 흔들며 지나가는 그러한 죽음입니다. 입술이 타들어가는 목마름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는데 그 말 한마디 까지도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생애와 말씀하심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1. 다 이루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죽으실 때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들이 서로 일치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외친 일곱 말씀을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이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고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하신 말씀이 누가와 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외치신 말씀이 복음서마다 다르게 기록된 것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자신들이 증거 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잘 나타내주는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다른 복음서의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기록한 것도 이 말씀이 요한이 증거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는 것은 일의 완성, 즉 완전한 성취를 의미합니다. 다른 무엇인가를 더할 필요가 없이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구원과 연결된 것이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결국 성도의 완벽한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더 이상 보태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완벽하게 성취된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 그 사람이야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허무는 사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라는 말이 허용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으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3-54)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증거물은 인자의 살과 피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에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인자의 살과 피는 곧 예수님의 죽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다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의미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함께 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용해서 천국가려고 하지 말고 신자 또한 죽은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나는 천국가게 되었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싫어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하는 신자, 그가 곧 생명을 얻은 자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하는 능력이지 착한 일을 하게 하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겠습니까?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주님의 길을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증거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로서 주님의 길을 가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죽으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으로 생명의 증거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생명에 대한 모든 것은 완벽히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이 완성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누리는 것이지 뭔가 다른 것을 보태서 좀 더 멋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믿는다는 것
그런 구원이 필요한 인간이 어떠한 자리에 있는지를 히브리서 2장에서 보겠습니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2:14-15)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토록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죽으면 안 되고 살아남아야 된다고 하며 살아왔습니다. 거기에 그냥 살아남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 잘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실패하면 안 되고 성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한번 성공한 인생임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소원이나 욕망은 만족이 없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소원이 없겠다고 해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이룸이란 게 허무하여지고 또 다른 목표가 눈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 매여 있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남은 죽더라도 자신은 성공해야 한다는 시기와 경쟁 속에서 오늘도 계속하여 가속도가 더하여 가는 것이 세상의 삶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잔인해야 되고, 더 경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시대의 흐름 속에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교회도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하는 책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러나 성도란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에 참예된 사람들입니다. 이 다 이루심을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혈육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사망의 권세아래 들어가셔서 죽으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이 오히려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던 마귀의 권세를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가 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사망의 권세에게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란 죄의 권세며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우리를 건지심이 예수님의 다 이루심입니다. 골로새서 2장입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2:8-23)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12절의 말씀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사망이 두렵지 않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이기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살고자 할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속한 것들이 그림자입니다. 16절 이하에 있는 이러한 날과 달과 절기들 그리고 법에 속한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다 이루신 분이 옆에 계시는데 그것을 또다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 이루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1)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다 이루지 못함에 안절부절 하며 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한 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의 아담에게는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명령은 한 가지지만 이 명령 가운데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를 어김은 결국 자신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사단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삶의 원리는 인간이 주인으로서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여 인간들이 신처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기 싫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 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을 하든 안하든 간에 성경이 증거 하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로 보건데 어떤 인간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고 하십니다. 여기 ‘이제는’ 이라는 말씀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현실은 누구든지 죄에서 탈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내용입니다. 어느 인간도 스스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의는 하나님의 의이기에 차별이 없는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란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심이요 이것으로 또한 자기의 택한 백성을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 편에서는 ‘값없이’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3-26) 이렇게 우리는 값없이 구속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 값을 대신 지불하신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자체가 최고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도 늘 인간중심으로 봅니다. 그래서 인간 구원론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인간 구원중심으로 성경을 보았기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통해 자기들의 영생에 대해 상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아가 오기를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가 와서는 너희들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완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완성이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도 이루지 못하였고, 제사와 제사장도 이루지 못하였고, 왕도 이루지 못한 그 일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들을 부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아래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12-21)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사망의 왕 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는 아무리 순종을 한다고 해도 죄 아래, 사망아래 갇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의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완성이 되고 그 완성된 의의 선물을 믿는 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순종이 결국 십자가의 죽기까지의 순종이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죽기까지의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루신 순종인 것입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5장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5:8-11) 예수님의 순종이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의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이러한 고난의 순종에 이른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 즉 그를 순종하는 자에게도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는 구원의 근거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영생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지 못한 인생은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누린다고 하여도 가장 불쌍한 인간이며 실패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의 그런 가치기준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이 사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인하여 영원토록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들이 성도들이며 참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다 이루신 그 사실을 믿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무엇인가가 더하여 질 필요가 없음을 믿습니다. 오직 그 이루심을 믿으며 이제는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위엣 것을 찾으며 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을 세상의 가치 기준 때문에 요동하지 않도록 굳게 지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 앞에 서는 그 날 그 믿음을 지킨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이 다 다르게 묘사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3.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믿는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
4.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율법 아래서의 우리의 순종과 예수님의 순종의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