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언과 방언에 대한 성경 이야기
본문 / 고전14:20-25
1. 기독교
교회 달력을 보면 내일이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왜 로마교회에서 개신교가 분리되어 나왔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론들이 많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것처럼 사도시대에는 부분적으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언이나 방언이나 방언 통역을 통하여 주어졌지만 그 모든 예언과 방언이 다 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뒤에 있는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 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26-33) 서로 제제를 받아야 하고 분별을 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시대로 계시적인 은사는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시대가 마감이 되고 나서 사도들에게 직접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을 속 사도라고 부릅니다. 속 사도들은 직접 계시를 받은 사도와 자신들을 엄격하게 구별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도시대와 그 이후 3세기까지 엄청난 핍박이 교회에 왔지만 복음은 계속 증거 되어 갔습니다. 그러면 그 핍박의 시대에 수많은 기적과 계시가 계속 주어졌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연구한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속사도 교회의 첫 50년(주후 100-150년) 동안에는 이적이 있었다는 증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50년(주후 150-200년) 동안에는 조금 그리고 대수롭지 않는 이적들이 나타났으며 그리고 4세기에 이르러서야 풍성하고 정밀한 이적들이 나타났고, 5세기 이후로는 계속 증가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겠습니까? 사도시대 이후에는 기적이나 표적인 거의 없었는데 왜 3-4세기에 들어가면서 이적과 기적들이 많이 나타났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핍박 받는 교회가 힘을 가지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는 이방인들이 함부로 기독교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2년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면서 기독교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핍박을 하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미신적인 것과 신비종교들까지 기독교의 이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권력과 결탁하게 되고 돈이 많아지게 되니 온갖 부패가 다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교회사란 욕망하는 인간의 배설물’ 이란 말까지 합니다. 그런 배설물의 냄새를 맡고서 마르틴 루터가 오직 계시는 성경뿐이라고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그리고 구원이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라고 외친 것이 494년 전 10월 31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종교개혁을 한 오늘날 개신교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이야기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기는 합니다. 일 년에 한번 종교개혁 기념일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사란 욕망하는 인간의 배설물인 것처럼 개신교 역시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계시처럼 간주하고 있습니다. 온갖 체험과 성공사례를 성경의 계시보다 오히려 우위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뒷전이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보자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만 그럴듯하면 성경을 가지고 얼마든지 포장해주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방언과 예언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14:20)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바울은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하는데, 자기를 과시하는 자기 증명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친히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가 임하였다는 것은 성도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사를 받은 자들이 은사를 받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이야기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나에게 무슨 은사가 임하였다 하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무언가 특별하니까 이런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가장 고질적인 모습이 목회자들입니다. 얼마나 부족하였으면 목사로 은사를 다 주었겠느냐고 생각해야 하는데 목회자들은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이 남들보다 나은 게 있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보다 못났기에 사도로 세워졌다는 것이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1:15-17) 이것이 은사 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단 한마디라도 나오지 않습니다. 죄인중의 괴수였는데 주님의 긍휼을 입은 까닭은, 자기 후에 주님을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나 같은 죄인도 용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은혜와 은사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일절 자기의 자랑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전14:21-22)고 합니다. 여기 말씀에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방언을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며, 저 사람은 신적인 간섭이 있고 신과 직통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본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 정 반대로 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28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사28:1) 이사야 28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교만하여 질대로 교만하여 진 것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라고 책망합니다. 교만을 면류관처럼 쓰고 있으니 교만의 절정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말씀이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사28:11) 즉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결과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는 것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온갖 약탈을 다 하는 것입니다. 온갖 약탈을 다하면서 그들이 한 말이 더듬는 입술과 생소한 다른 방언이었습니다. 그러니 방언이 나타난 것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쪽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러니 역시 다른 방언이 나타났다는 것은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방언을 말하면서 왜 이사야 28장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방언한다고 떠들어 대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지금 너희들이 하는 모습이 마치 이방인들이 쳐들어와서 방언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에 이방인인 앗수르와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방언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해만 되었듯이 너희들이 전부 방언만 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이 되면 교회에서 하지만, 통역이 되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인들은 다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이 예언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 이제 새 언약으로 완성 되었기에 온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하시며 모든 권세와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이 복이라고, 그렇지 아니하면 철장권세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방언 = 복음
그럼 방언이 아니라 예언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까? 24절입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14:24-25) 즉, 예언을 할 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그 예언을 통해 책망과 판단을 받고, 그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숨은 일들이 드러나 마음에 가책을 받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들이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신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방언을 한다고 온 교회가 왕왕거리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미쳤다고 하겠지만 모든 교인이 다 예언을 하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언이란 점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하실 일을 증거 하는 것이 예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예언을 들으면 그들의 마음의 숨은 죄가 드러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복음을 들은 자들이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핍박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더 많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증거 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 하게 되면 반드시 죄에 대하여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숨겨진 것들이 복음으로 다 들추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감추어진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셔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면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흰 옷을 사 입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가련하고 벌거벗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또다시 복음을 듣고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으로 만족하고 있는지 또 무엇이 있으면 만족하다고 생각하는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야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알고 흰 옷을 사 입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게 되어 책망과 판단을 받게 되면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과연 ‘너희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말씀은 구약 성경 스가랴 8장에 있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슥8: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면 이렇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러 와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때 돌아오는 자들이 바로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은 방언입니다. 이상한 소리가 방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방언인 것입니다.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이 방언(복음)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방언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구원이 오직 은혜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음에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방언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모할 방언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 것입니다. 이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가 있지만, 은혜를 받은 우리는 다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방언을 알아듣기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 방언을 하시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하심을 말하며 또 순종함으로 우리의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이 돌려지는 날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이적과 기적들이 속 사도사대에는 잘 나타나지 않다가 3-4세기에 이적과 기적이 많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종교개혁의 외침과 오늘날 교회에서 외침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3. 주께서 은사를 주신 이유는 무엇이며, 그 은사를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4. 바울이 말하는 방언에 대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5. 우리가 해야 할 예언과 그 예언을 듣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오늘날 방언은 무엇이며, 그 방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