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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하노니

본문 / 고전15: 1-11

1. 전한 복음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전15:1)고 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알게 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받지 않아서 복음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이라고 합니다. 이미 바울이 전한 복음을 고린도 성도들이 받았고 그 가운데 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다시 복음을 알게 하여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 가운데 로마서는 흔히들 교리서라고 하여 복음의 핵심을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도 이미 로마에 복음을 듣고 있는 자들에게 다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한번 듣고 섰다고 해서 어떤 단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시작이요 끝이며 전부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며 또한 의인이 믿음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복음을 듣고 그 가운데 섰다고 하는 고린도 교회에 또 복음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문제들이 고린도 교회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파당이 생긴 문제, 음행의 문제, 우상제물의 문제 그리고 지난주 까지 보았던 은사의 문제들입니다. 이런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것도 오직 복음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복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15:2)고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와 방언과 통역과 예언들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들었다면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하는데 이미 복음을 들었다고 하는 고린도 교회는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어서 이미 구원은 챙겨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을 경험해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행함으로 복을 받자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부터 믿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무언가 더 나은 것이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뛰어나고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은 믿지 아니한 사람과 분명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른 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의 많고 적음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분별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삶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즉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모습은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며, 외국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건은 다 쓰지 못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고 이미 완성된 세계, 그 아들의 피로 만든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구별과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 대해 성경에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좀 더 착하게 살아야지’ 하며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착하게 살아서 이 세상을 좀 더 살맛나게 만들어야지 그런 생각은 불신자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구별됨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 시대가 노아 홍수 때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와 같은 곳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때 보다 더 악한 심판의 장소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땅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해된 곳이 이 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입니다.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계11:8) 이 말씀 앞에 보면 두 증인이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여 길거리에 사흘 반 동안 전시가 되고 구경거리가 됩니다. 왜 죽임당하는 것입니까? 이 땅에 붙어살고자 하는 자들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죽임당한 곳이 영적으로 말하면 소돔이며 애굽이며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입니다. 이런 세상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고 불살라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곳에 사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다시 본문에 보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라고 합니다.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증거 하였다고 합니다. 그 증거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대로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대로 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입니다. 왜 그것이 복음이 되는가 하는 것은 로마서 4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3-25)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주심이 되었습니다. 그의 살아나심은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란 우리에게는 전혀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창조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로 받게 된 것이 복음입니다.

2. 어리석음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편을 가르고 서로 시기하고 경재하고 있다면 어떻게 복음을 들은 자의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것도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인데 자기 자랑하고 자기 자존심 세우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이미 복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복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입을 닫고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얼마나 자기 잘난 체 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자기 자존심을 세우며 살아갑니다. 눈만 뜨면 생각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한번 보란 듯이 살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속히 해결하고 그 보다 열배 백배 더 나은 환경과 조건에 서서 내가 예수를 잘 믿었더니 이런 큰 복을 받게 되었다고 하면서 큰소리 한번 쳐 보고 싶은 게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의 마음은 몰라주고 왜 우리에게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형편을 주셨는지 불만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하나님께 물어도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니 답답해서 목사님께 알려 달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만 일류대학에 합격을 한다면 내가 새벽기도인들 금식인들 또 많은 물질인들 하나님께 못 받칠게 무엇이겠느냐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되니 목사님들은 무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성도님이 믿음으로 기도하시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저도 특별히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해야 합니까? 아니 지금 시험이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 예수님의 죽으심이 지금 나의 형편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이 도대체 지금 나의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 하는 것이 대부분 문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마음이며, 시험에 든 성도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도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는 자라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문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렇게 난다 긴다 하는 잘난 사람들에게 바울사도가 무엇을 제시하는 것입니까? 바울 파, 베드로 파, 아볼로 파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자기 자랑이 나오고 시기와 경쟁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계속하여 나왔고 지금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들으면 나오지 않습니까?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 까지 더 드러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야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더욱 더 의지하고 믿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의 복음

그러면 이러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 사도 자신은 이 복음을 받게 되고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15:5-9) 여기 왜 부활의 목격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고린도 교인들 중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베드로가 만났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오백여명의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그 중에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다고 하고 그리고 맨 나중에 바울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맨 나중이라고 하면 그 뒤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다음에 누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거나 어디에 예수님이 있다고 하여도 믿지 마시고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바울이 열심이 특별하였거나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그랬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라고 합니다. 칠삭둥이 팔삭둥이라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보자면 조산된 자요 유산된 자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더 못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여 사도라 칭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바울은 그렇다 쳐도 그러면 다른 사도들은 나은 것이 있었습니까? 다른 사도들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사도됨이란 결코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물며 사도들도 자기들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복음인데 그 복음을 듣고서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복음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될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자신이 복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좋아서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지만 그러나 자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아니요’ 라고 하여 자기 부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부러 겸손하게 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전부 다 사실인 것입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제대로 받고 그 복음에 선 자들은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15:11) 여기서 ‘나’는 바울 사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란 다른 사도들입니다.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다 어떻게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은혜로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과연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까? 우리가 믿게 된 것이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앞에 3절에서 말씀하신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간단하고 기초적인 내용을 왜 은사가 풍성한 고린도 교회에 다시 알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 십자가에 나타난 죄에 대한 징벌과 용서와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복음의 비밀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받은 자의 반응은 지옥가야 마땅할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모든 것을 은혜로 받고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에게 베풀어진 어느 것 한가진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은혜가 희미하면 복음이 희미한 것입니다. 오늘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권면하는 이 말씀을 내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하는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모든 삶에서 울려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가 아닌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내가 아닌 그리스도만 높여 드리는 우리들의 삶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려 드리는 우리들의 신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고린도 교회가 이미 들은 복음을 다시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헛되이 믿은 까닭은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3. 바울이 받아 전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복음이 되는 것입니까?

4. 하나님께서 복음을 다시 듣게 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자의 특징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6.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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