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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교회를 위한 염려 때문에 하는 바울의 자랑

본문 / 고후11:28-33

 

 

1. 고난보다 더한 염려

지난주에는 바울사도가 어리석은 자랑이라고 하는 내용에 대해 함께 나누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출신과 자신의 수고를 이야기 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그런 자랑을 통해 내가 진짜 사도라는 것을 알아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어리석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들처럼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그것은 바로 교회를 위한 염려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언급한 일들은 바울사도가 교회에 대해 염려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한 번 바울이 언급한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수고를 더 많이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는데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한 번도 아닌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리는 것은 신명기 25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면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앞에서 그의 죄에 따라 수를 맞추어 때리게 하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25:1-3) 사람 사이에 재판을 할 때에 악인에게 죄가 있어서 합당하여 태형을 가하려면 재판장이 죄의 경중에 따라 그 매의 수를 적절하게 정하는데 최고한도가 40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넘기면 형제를 경히(천하게) 여기는 것이 될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악인에게 태형을 가할 때에 39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혹시 매의 수를 잘못 세어 실수하여 40대를 넘기면 율법을 범한 것이 되기에 39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에 근거하여 재판을 받고 매를 맞은 것이 무려 다섯 번이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 하는 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 한 바울사도에 대하여 그 율법을 가지고 그 증인을 태형 중에 최고의 형인 39대를 다섯 번이나 때린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 태장으로 맞은 것은 로마의 법에 의한 것입니다. 태장이란 로마시민에게는 금지된 태형으로 채찍 끝에 납을 달아 치는 무서운 형벌이며 이 태장을 맞는 중에 죽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선교적 목적을 위해 로마 시민의 권리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로마 관리들이 죄수 된 자의 신분을 먼저 물어보는 법 절차를 무시한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돌로 맞은 사건은 루스드라에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둘러 서 있는데 다시 일어나서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 외의 수고들은 세 번이나 파선하고 여러 가지 위험들이 산재하였으며 춥고 굶주리고 헐벗었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수고보다 더한 수고로움이 있었습니다. 방금 언급한 이런 고난만 해도 감히 사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들인데 그런 것은 고사하고 더 마음에 눌리는 염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수고도 다 교회를 위한 수고이지만 교회에 더 위협이 되는 것은 이런 외부의 핍박이 아니라 내부의 거짓 진리에 속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생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랑도 하고, 자신의 수고를 말하는 것이지 자기를 알아달라고 하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수고한 자신을 남보다 더 대접하여 달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 때문에 날마다 눌리고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자신의 육체로 당하는 고통보다 더한 염려인 것입니다. 바울이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를 하는 것은, 거짓 선생들이 교회 가운데 들이 닥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교회에 대한 염려는 오늘날 우리가 염려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에 대한 염려는 주로 교회가 어떻게 부흥 성장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성공적인 목회를 할 것이며, 교회당 건축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런 내용의 염려가 바울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배당을 아담하게 지어서 예배도 좋은 환경에서 드리고 또 우리의 자녀들 결혼식이라도 아름답게 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그런 염려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의 염려는 무엇이겠습니까?

 

 

2. 복음과 거짓 복음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20:28-31)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다시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보지 못할 수 있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떠나면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외부에서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중매를 해 놓았는데 그런 양떼에게 해를 가하려고 이리 같은 자들이 양의 탈을 쓰고 와서는 자신의 종으로 삼고 잡아먹는 것입니다. 뺨을 쳐도 용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까?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거짓 선생들에게 넘어가는 것은 바울이 채워주지 못한 인간의 욕망을 거짓 선생들인 그들이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일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높여준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일을 하면 주님은 나의 일을 해주셔서 가정도 사업도 잘 되고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으니 우선 교회를 위해 충성하라고 합니다. 사람의 공로와 자랑을 함께 섞어 넣는 것인데 이런 말들이 사람들에게 좋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복음을 증거 한 주의 종들이 언제 세상의 영광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주님께 충성하고 순종하고 헌신하면 그 대가로 세상에서 높아지고 영광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바울사도와 같은 신세가 된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보상이 안 된다면 저 세상에서라도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여야 할 것인데 보상은커녕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이것이 복음을 증거 하는 자의 보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고전9:16-18) 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되 값없이 전하고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 자신의 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가 이렇게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조차도 포기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너무나 좋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 받은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되었기에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이 주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4-15)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사랑 받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아니면 피하고 싶은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거짓 선생들이 와서는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이런 사랑보다는 그리스도도 드러나지만 자기 자신도 드러나고 살아남는 그런 방식을 이야기하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나 복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왜곡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드러나고, 예수님만 선포되고, 예수님만 존귀케 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파하고 또 예수님을 믿으니 나도 그렇게 드러나고 잘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과연 듣길 원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믿고서 오늘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고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부러운 것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비록 내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다고 하여도 예수님의 그 사랑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 복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 내가 무언가 세상에서 덕을 보고, 세상에서 보란 듯이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고난 받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그 십자가의 길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길에 많은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이 와서는 십자가의 길을 세상의 영광으로 포장하고 있기에 참 복음을 전한 바울사도가 염려하는 것입니다.

 

 

3. 자랑

다시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11:29) 라고 합니다. 왜 약하고 실족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바울이 당한 고난은 교회 밖에서 오는 것(23-27절)과 교회 안에서 오는 것 해서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교회 안에서 오는 고난은 성도들이 온전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거짓 사도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멀어지거나 또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하여 도전받는 것이 바울의 고난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해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 대해 동정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태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살아있는 그의 몸 된 교회에 대한 것으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게 되는 것과 또 실족하여 죄에 빠져 믿음을 잃게 된 것에 대하여 애타하는 그의 사도적이며 목회자적인 열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이 가르치는 내용인 예수님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기고 다른 것이 추가되어야 한다거나, 세상의 영광에 미혹되거나 간에 다 연약하고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염려는 한가지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외면하게 만들고 율법적인 행함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성도들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묻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를 꾀는 그 모든 유혹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끊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 세상에서도 잘 되어야 복음이 잘 전해진다는 달콤한 유혹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 고위 공직자에서 퇴임하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부패는 악취가 아니라 향기를 품기며 옵니다. 그 유혹은 차마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우리의 이성을 제압하고 도덕성을 무력화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나는 출산의 고통 없이 올곧은 자성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유혹도 달콤하게 오는데 영적인 유혹은 얼마나 더 달콤하게 다가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되는 모습으로 유혹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생들이 인기를 얻고 그것을 따르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런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자신의 자랑은 오직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세상이 다 자기의 잘남과 세상의 영광을 자랑하는데 바울사도는 자신의 약함만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염려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거짓 선생들에게 속아 세상의 영광과 외모에 넘어가고 있기에 자신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미련하고 약하게 된 것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약함을 이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11:31-33)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성문을 지키고 있어서 바울은 줄을 맨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간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당당하게 나서서 장렬하게 죽든지 아니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적들이 다 엎드려지든지 하면 복음이 더 잘 전해질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들에게 광주리를 타고 도망간 이야기는 정말 볼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렇게까지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12장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바울이 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남으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약함으로 그리스도가 드러남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바울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과연 무엇을 염려하고 있으며 또 무엇을 자랑하고 싶습니까? 고린도 성도들처럼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자랑하고 싶어 거짓 선생들의 거짓 된 복음의 길에 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에 빠져 복음을 져 버리려는 지체들에 대한 염려와 기도로 무장하시고, 우리가 약할 때 온전하게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음으로 바울과 같이 그 약함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그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세우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은혜의 삶이 우리의 모든 범사 가운데 항상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울이 자신도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 자랑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바울의 교회에 대한 염려는 무엇이며 또 그의 염려는 우리의 염려와 어떻게 다릅니까?

3. 교회가 이리 같은 거짓 선생들에게 넘어가는 이유와 그들이 전하는 내용은 무엇이니까?

4. 바울이 전한 참 복음의 내용과 바울이 그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교회들이 약하여 실족하는 이유와 그들을 바라보는 바울의 심정은 무엇입니까?

6. 믿는 자들을 유혹하는 그 유혹의 맛과 그 유혹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7. 바울이 우리가 보기에 어리석고 볼품없는 이야기까지 가감 없이 전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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