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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예수님의 가족

본문 / 3:31-35

 

 

1. 하나님 나라의 관계

이 세상에서의 인간관계는 혈연과 학연 그리고 지연을 중심으로 형성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전혀 새로운 의미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와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찾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3:33 )라는 말씀으로 그들과의 관계를 부정하시면서 내 어머나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4-35)고 말씀하심으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코 어머니와 형제들의 관계를 부인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19:26)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어머니와의 혈연적 관계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어머니나 형제들과의 혈연적 관계를 부인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생명의 관계는 세상의 기준과 원칙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기준과 원칙에 의해서 묶여지는 관계임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기준과 원칙으로 묶여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2. 누가 어머니이며 형제냐?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항상 시비와 모략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하여 시비를 걸었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권세를 귀신의 힘을 빌어서 하는 것으로 매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에 대해 미쳤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반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21절 말씀을 보면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3:21)고 하여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은 친속들이 예수님을 데려가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찾는 것은 결국 미쳤다고 여기는 예수님을 데려가기 위해서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왔다면 예수님을 불러낼 필요 없이 그냥 집으로 들어가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어머니와 형제를 두고 오늘 본문에 누가 내 어머니이며 형제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으로는 예수님과의 생명의 관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관계는 인간적인 혈통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10:3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세상에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오신 분으로 말씀합니다. 이 말은 결국 세상이 생각하는 예수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평화의 사도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에도 강조되는 것이 항상 평화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화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10:35)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이 아닌 검, 즉 불화를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화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여겨지는 혈연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관계를 끊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세상에서의 혈연관계를 다 부인하고 부모 자식 그리고 형제 관계도 다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나라의 특징이 세상의 인간관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관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통용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혈연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고, 학연과 지연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설사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또 예수님의 형제라고 해도 그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처럼 신자라는 관계는 같은 지역과 같은 학교 그리고 같은 집안사람이라는 것으로 한 편을 이루는 수준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은 이런 하나님 나라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할례를 하고 율법을 지킨다는 것으로 자신들만을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과 율법과 전통적인 규례를 기준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기준으로 세운 그 기준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고, 유대인의 순수한 혈통이 아니라고 여겼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처럼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관계는 유대인들의 기준과 생각처럼의 나라가 아닌 전혀 새로운 것으로 묶여지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혈통이나 유대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열심과 공로로 하나님 나라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고 말씀합니다. 주여 주여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다고 해서 모두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평생토록 주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서도 종국에는 천국과 상관이 없는 자로 전락되는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믿음의 착각에서 깨어나 생명이 되는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바르게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행함을 구분하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뒤에 23절을 보면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3)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행함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것으로 구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구분하시는 행함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거짓선지자의 미혹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고,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단지 거룩하고 착하고 의롭고 성실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는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을 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심판을 선포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착하고 선한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면, 자연히 불법을 행하는 것은 악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분리됩니다. 물론 이러한 분리는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시각에서의 선과 악 그리고 인간의 시각에서의 선과 악이 다르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시각으로만 접근하게 되면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행함은 윤리와 도덕적 행함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성경에서의 불법은 한마디로 말해 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이 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난 일들이라면 불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바르게 알아야만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한 그들은 종교적인 열심과 실력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전심을 다해 주의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른 목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 가신 길을 가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병들고 죽어 가는 자리에서 다만 예수님으로 기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하기 위해였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큰 권능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기를 바라고 주의 이름을 불렀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하기 위해 부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법인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든 자신을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여건과 환경을 바꿈으로써 좀 더 평안한 삶을 살고자 하고, 그러한 삶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욕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난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내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과 환경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여건이고 환경인 것입니다. 어떤 여건과 환경에서도 오직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귀신을 쫓고 권능을 행했지만, 예수님이 그 같은 일을 하신 목적은 인간의 육신을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일생을 편히 살도록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세상에 오셨는가를 알고, 그들의 잘못된 메시야 관을 깨닫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에 매료될 뿐이었습니다. 육신의 병 고침만을 원했을 뿐입니다. 다만 육신을 이롭게 하는 기적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예수님을 좇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나 죽으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십자가도 내 구원을 위해서 믿어야 한다면 믿어주겠다는 식이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주를 따른다 해도 또 주를 믿는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다 불법을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각기 주어진 분량이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대로, 즉 주어진 상황과 여건에서 주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해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가족

그리고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두는 신자의 관계로만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가족으로 묶어 놓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믿음의 관계 안에 모이는 교회라면 세상 관계의 냄새가 풍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는 무너지고 다만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믿는 믿음만 굳게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9)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혈통적 관계는 돌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른 이유와 조건으로 하나로 엮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와 그 생명으로 엮여지고 하나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말하는 교회라면 세상의 그 어떤 조건과 그 무엇으로도 사람을 구분하거나 차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형편과 조건을 모두 떠나서 신자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관계로 모입니다. 그리고 한 가족이라면 서로 닮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서로 같은 마음을 드러내게 되고 또 같은 생각을 서로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서로 만날 때마다 내게 있는 것이 상대방에게도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것을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내게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한다고 해서, 내 것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방을 파악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내 뜻을 가지고 상대방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서로가 자기의 것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자기의 것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만 바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속에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서로를 본다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같은 마음이 되고 같은 생각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했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흔적이고 기적의 사건인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뜻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내 뜻보다 더 높고 더 크신 하나님의 뜻의 귀함과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곧 내가 영원히 사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런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복과 혜택을 함께 누리는 관계에 있음을 뜻합니다.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복이고 혜택이기 때문에 누가 덜 받고 누가 더 받는 것 또한 없습니다.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기에 차별도 구별도 무시도 없는 관계 이것이 가족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으로 모인다면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내가 가야할 길로 여기며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주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도 같을 것입니다. 오늘도 같은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로서 우리에게 동일한 감사와 찬송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매주 예원가족 모두가 이러한 예수님의 가족으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 긴 의미는 무엇입니까?

2.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친족들이 예수님을 찾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이 이 땅에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유대인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과 또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그들의 삶은 무엇 이며, 어떤 증상들이 나타난 것입니까?

5. 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말씀의 의미와 왜 그렇게 보게 된다고 합니까?

6. 하나님 보시기에 불법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7.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란 무엇을 말씀한다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에 예수님의 가족은 어떤 자들이며 또 그들의 특징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9. 오늘 말씀에 신자는 어떤 자라고 말씀합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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