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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본문 / 4:21-29

    

 

1. 성경을 보는 시각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외인, 즉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는 자로 하여금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약속 밖에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줘도 알 수 없고, 들려줘도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4:21-22)고 합니다. 마가가 이야기하는 이 말씀을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5-16)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마가는 산상설교가 아니라 씨 뿌리는 비유와 함께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같다고 하여도 마태복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많은 내용들이 서로 중복되고 있습니다. 중복된 그 모든 내용들이 같기 때문에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면 복음서는 서로 나누어 놓을 것이 아니라 통합해서 한권으로 만드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서로 중복된 말이 많으면서도 각기 다른 책으로 존재하는 것은 서로 예수님에 대해 다른 시각의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를 무시하고 성경을 본다면 같은 사건에서 같은 해석밖에는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의도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마태의 의도

오늘 본문 말씀도 그런 이해 가운데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마태가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것과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는 씨 뿌리는 비유와 함께 이 구절이 등장한다는 것부터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마태가 산상설교에서 이 구절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마태는 이 말씀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함으로 세상에서의 신자의 존재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많이 오해하여 신자의 신자 됨을 항상 도덕과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신자라면 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감 속에 사는 신자들은 아마 자신의 신자 됨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정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착한 행실은 있어야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도 우리 스스로가 그러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되지 않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나 또 자기 신앙에 대하여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너희는 소금이니 짠 맛을 내어라고도 말씀하지 않았고, 빛이니 빛을 내어라고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세상에서 짠 맛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소금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말씀할 뿐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세상은 오직 땅에 것만 추구하고 또 자기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하는데 적어도 너희는 그곳에서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소금인 너희는 세상과는 다른 하늘의 것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신자의 존재성을 항상 간직한 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맛을 잃지 않는 소금과 빛이며 또 하늘 생명을 가진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대부분 생명이 있다는 것의 특징을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생명의 결과일 뿐 본질은 아닙니다. 즉 열매는 생명이 있다는 흔적인 것이지 열매가 곧 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생명 자체보다는 열매를 맺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빛을 비추고 짠 맛을 내고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불태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을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저주의 나라인 애굽에서 구출 받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땅에는 이미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죽음을 이긴 경험이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장자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재앙을 넘기고 애굽에서 빠져나온 생명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요구한 것은 신명기 11장에 보면 “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11:8-9)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고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이며 이 실패로 말미암아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생명에 도달 할 수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인간의 무능함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의로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보내신 의가 곧 생명임을 깨닫고 그 의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특징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무 단순한 이야기입니다만 인간의 습성이 어떠한가를 알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한다는 것이 말처럼 단순하고 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3. 마가의 의도

하지만 마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의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4:22)고 하는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는 숨겨지고 감춰져 있는데 말씀이 세상에 오심으로 감추어졌던 것이 모두 드러나고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오심으로 감추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외인들은 이 비밀을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이 외인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나라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밭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일단 열매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나 결과로 인식을 합니다. 전도를 해서 수십 명이 교회를 나오게 되고, 담배를 끊고 술을 끊으며, 기도를 많이 하게 되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게 되는 그런 것들을 열매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열심과 노력에 의해서 열매가 맺어지고, 인간의 열심의 정도에 따라서 열매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사람들에게는 믿음은 신비로운 사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믿음에 의해서 나타나는 어떤 가시적인 사건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 자체로는 감사하지 못하고 믿음으로 인해서 병이 나았다거나, 어떤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인해 감사하고 그것을 열매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믿음의 역사를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음의 역사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해서 죄에 대해 통회하며, 자신의 무너짐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인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가시적인 것을 열매로 기대하는 사고방식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이와 같은 말씀의 역사와 신비로움들이 귀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보다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는 것이 더 신기하고 큰 능력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세상에 보여줄 수 있고, 자신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을 열매로 간주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세상이 볼 때 하찮게 여기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하지만 외인들이 볼 때는 하찮은 것이 하나님의 택한 신자가 볼 때는 하나님의 역사가 되고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는 이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고, 말씀 역시 이들만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신앙 역시도 가시적인 차원에서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로 만들어 주는 것이었고, 신앙 역시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도무지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말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2-25)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세상이 볼 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것은 미련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전도의 효과를 위해서 믿음에 대한 부가가치를 얘기합니다. 즉 천국만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복과 평안을 함께 보장해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교회가 말씀만 전하면 안 되고 병 고침도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말씀만 전하는 것보다는 병 고침도 있어야 더 효과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하는 것을 한쪽에 치우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고 합니다. 과연 성경 어디에 바울이 자랑하는 십자가만을 전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결국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전도로 인한 가시적인 효과, 즉 교회의 부흥을 노리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것이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아도 알 수 없고, 들어도 깨달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병 고침 받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보다도, 완악한 마음의 소유자인 내가 나의 불의함을 깨닫게 되고, 나의 성공과 나의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가던 내가 예수님이 가신 그 고난의 길에 순종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이것이야 말로 좋은 땅에서만 나타나는 말씀의 결실이고, 산이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고 기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고방식의 사람들은 가시적인 것을 기준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헤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부터 보면 “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4:24-25)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가시적인 것을 열매로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라면 가시적인 것으로 타인을 헤아리고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가시적인 것이 기준이 된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행위로 타인을 판단했다면, 예수님 역시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긍휼 없는 심판만 있을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부터 보면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4:26-29)고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렸지만 씨가 자라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역사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음을 우리가 실감하지 못하고 가시적인 것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말씀은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열매를 기대하고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열매를 맺으실지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신자는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고방식이 하나님 나라의 사고로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좋은 땅의 신자 되었다는 것이야 말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기적을 맛보아 누리며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복음서에서 같은 내용의 말씀이 있어도 동일한 해석을 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빛과 소금은 무엇이며 또 그것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무엇입니까?

3.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맛을 잃은 소금과 그렇지 않는 소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4. 생명의 특징의 대한 우리의 착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출애굽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생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6. 마태와 달리 마가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하려고 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7.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인간들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열매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 가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며 또 주님이 말씀하시 는 천국의 말씀의 역사는 어떠하다고 합니까?

10.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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