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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본문 / 고전 12: 1- 3

 

1. 오해

신자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해도 육신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며, 육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은 모든 유혹과 욕망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도대체 신자와 함께 하시면서 무엇을 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면 죄의 유혹을 이기면서, 죄로부터 벗어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성령이 죄를 이기는 것이고, 그것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성령 받은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으되 여전히 죄를 이기지 못한 자로 산다면 그것은 곧 성령이 죄의 세력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인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둔 사람의 성령의 대한 오해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이 오시면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있게 되고, 죄를 이김으로써 거룩한 삶이 가능해 질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된 인간의 욕망에 의한 생각일 뿐입니다.

신자가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 달라지는 것은, 육신에 관심을 두고,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들을 예전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죄의 세력에게 지배를 받는 죄의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하며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이 성령이 오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변화인 것입니다.

 

2. 성령 받은 증상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12:1)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신령한 것에 대해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했던 문제들은 신령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무지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외적인 모습이나 행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신령함은, 성령이 함께 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앎으로써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가 생명임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깊이 알기를 소원하는 그 마음이 신령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한다면 예수가 나의 주다라는 말을 하면, 그는 성령 받은 자가 됩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예수를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예수를 저주할 수는 없는 것이고, 얼마든지 예수로 주로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그들 모두 성령 받은 것이 되는 것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도의 말은 우리가 그냥 쉽게 이해하는 것처럼 예수를 저주하지 않고 주라고 고백한다면 다 성령 받은 것이다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또 예수를 저주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령 받은 사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예수를 저주할 수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도 예수님을 저주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마태복음 26장입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6:69-75)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를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한 것은 자기 생존을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보다 자신이 사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존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성이 예수를 저주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베드로의 인간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도 나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예수를 저주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나의 생존보다 더 귀한 것이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나의 생존에 유리한 길만을 가면서 언제 어느 때든 예수를 저주할 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로 예수를 저주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장담한다면 그것은 정말 자기 자신을, 인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한 베드로도 이런 말은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26:31-35)고 합니다.

베드로도 우리와 같은 그런 생각을 한 자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생각이 있다면 베드로와 같은 수준에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신자가 예수님을 저주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라는 고백과 함께 주님을 크신 분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만을 크신 분으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크신 분으로 바라본다면, 상대적으로 내 자신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크고 예수님도 크다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만 크고 존귀한 분으로 보게 되고, 나는 작고 연약하며 무가치한 존재로 보게 되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참된 주로 자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크고 존귀한 분으로 보게 되면, 예수님에게서 주어지는 모든 것 또한 크고 존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십자가의 용서, 은혜 모든 것이 크고 존귀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로 인해 함께 하게 된 지체 또한 크고 존귀한 존재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고백에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보게 되면 자신이 큰 자로 높임 받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서로 비교하면서 누구의 것이 더 나은가를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3. 큰 자

오늘 본문 뒤에 보면 은사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가지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지고 누구의 은사가 더 나은지 서로 비교하면서 경쟁하는 다툼이 끊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무지였습니다.

신령한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보지 않고, 은사를 주신 예수님을 크게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크신 분으로 바라보고 존귀하신 주님으로 고백을 한다면, 예수님에게서 주어진 모든 것을 존귀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병을 구치는 은사든, 방언의 은사든, 예언의 은사든 상관없이 은사를 주신 예수님이 존귀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은사가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신령한 신자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나 자신이 아닌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예수님이 크신 분으로 나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가 큰 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음도 알게 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16:8)고 하십니다.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이루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하기 위함이고, 그 세계는 나의 죄인 됨을 절감하면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존귀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계에서는 자신의 봉사와 헌신에 눈을 돌리지 않기에 인간의 봉사와 헌신이 기준이 된 경쟁과 다툼도 없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놓으면서 누가 크냐라고 차별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신자가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서도 주가 크신 분이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타인을 대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주가 크신 분이고 나는 작은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에 큰 자로 행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하고, 내 힘으로 고치려고 하기도 하고, 잘했다 잘못했다는 판단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이 우리의 주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 믿음의 진정성은 우리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기는 것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기는 성령 받은 신자가 과연 함께 존귀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지체를 어떻게 대할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작은 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 모두의 대답의 자기 자신이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고 사는 자의 증상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위하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하나 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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