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골짜기에서 살아난 마른 뼈와 부활 신앙
본문 / 겔37: 1-14
1. 부활 생명과 종교
세상의 속한 가치관에 지배 받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은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만 자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부활 신앙에 눈을 뜬다는 것은 생존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영적인 생명에 더 크게 마음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현실이라는 실제적인 문제에 관심이 집중됨으로 인해서 자연히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신비한 생명 사건으로부터는 마음이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 사건, 즉 부활로부터 마음이 멀어진 상태로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이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로만 치중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헛된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종교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른 뼈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러한 종교적 신앙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사건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실적 문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종교로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마음의 평안과 현세의 축복 그리고 윤리와 도덕을 주제로 하면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복음은 이 사실에 근거해서 전파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한 죄의 용서와 부활이 복음의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부러워 할 축복을 넘치도록 받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 할지라도 죄의 용서와 부활 생명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임과 동시에 중심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이것을 무시한 채 인간이 선호하는 교회 만들기에만 열중한다면 그것은 헛된 믿음을 좇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분명 부활을 믿는 부활공동체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참된 생명의 문제보다 현재적인 문제에만 붙들려 있다면 부활을 믿는 교회답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신자답게 산다는 것은 어떠한 현실에서도 두려움에 눌리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의 신앙은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 신앙의 힘은 사라진 나약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내세적인 문제로만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죽은 신자가 나중에 때가 되어 예수님이 오시면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로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시 사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모든 일을 도우십니다. 따라서 신자가 현실적인 문제로 염려하고 불안해한다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 도우신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회복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2. 마른 뼈와 하나님의 영
오늘 본문의 저자인 에스겔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많은 유다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기원전 587년을 전후로 해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에스겔 1장부터 24장까지는 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 유다 백성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25장부터 32장까지는 유다를 점령하고 핍박하는 주변 나라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으며, 33장부터 마지막 48장까지는 선지자의 말기 활동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가 고통을 당하는 현실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백성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37장의 내용으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준 환상을 통해서 유다 백성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살게 하시고 회복하실 것임을 믿고 의지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의 소망이 되어 고통의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바라보도록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로 이끌어 갑니다. 11에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겔37:11)고 하는데 여기 등장하는 마른 뼈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아무 소망이 없이 고통을 겪고 있는 유다 백성들을 의미하며 또한 오늘날마치 세상의 악한 영에게 사로 잡혀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37:3 상)라고 물으시자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37:3 하)라고 답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마른 뼈들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시는데 에스겔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37:4-6)고 대언합니다. 그러자 뼈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뼈들이 서로 들어맞아 연결이 되며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임으로 사람의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여전히 생명이 없는 죽은 상태였고, 마른 뼈로 있을 때와 다름없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에스겔에게 대언을 하게 하시고 에스겔이 9절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겔37:9)고 대언하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곧 살아나 마치 군사들처럼 스스로 힘 있게 활동하는 생명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환상을 보여준 의미는 11절부터 14절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른 뼈들은 나라를 잃고 이방인의 땅에 포로로 끌려와 고통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운명과 삶도 마른 뼈의 상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들이 처한 삶의 형편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된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마른 뼈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무덤을 열고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을 무덤을 열고 무덤에서 이끌어 내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행하신다는 것을 마른 뼈의 환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유다가 해방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까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라는 것이 이유의 전부라면 환상은 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굳이 환상을 보여주지 않아도 선지자의 말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는 이 환상의 의미는 14절의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37:14)는 말씀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마른 뼈와 같은 죽음의 존재로 전락한 유다 백성에게 생명은 여호와의 영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환상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생기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곧 생명의 근원이며 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산 자가 됩니다. 어쩌면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들에게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하나님의 영과 상관없이 살아있는 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 역시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살아있는 자로 지으신 것이고 이것을 생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흙일뿐인데, 하나님의 영이 주어진 것 때문에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이 있는 생령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 맞게 살아간다면 선악과를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을 거부했어야 합니다. 자신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든, 높은 자가 되든 그것은 생명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자기 가치를 확대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는 죽음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포로로 끌려가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된 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살리는 생명임을 알지 못하고 이방인이 소유하고 누리는 것을 자신들도 소유하고 싶은 욕망으로 우상을 끌어들인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죽음의 상태로 밀어 넣으시고 마른 뼈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이 그들 속에 함께 하는 것이 곧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바사(페르시아)의 등장으로 인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됨으로 현실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고통과 수난은 계속됩니다.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과 예루살렘으로의 귀한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한 삶이 시작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단지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 환상이 보여주는 의미의 전부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소망을 두는 자로 살게 하는 것이 환상의 의미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게 됨으로써 육에 속하고 마른 뼈와 같이 죽은 자였던 우리를 살아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다른 얘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보는가’에 대해서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만의 기준을 세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의해 그리스도의 영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는 모든 것의 출처를 하나님의 은혜에 두게 됩니다.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모든 것의 출처를 하나님의 은혜에 두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자기 이름을 나타내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 몸은 죄로 인해 죽었지만 그래서 몸은 시들어가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영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3. 부활 생명을 누리는 자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영이 불어와 마른 뼈인 우리를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죽음의 자리로 밀어 넣으신다는 것입니다. 마른 뼈처럼 소망이 없는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 곧 우리 자신임을 자각할 때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함께 하심으로 생명이 있는 산 자가 되게 하신 일로 기뻐할 수 있으며 부활의 산 소망이 있는 자로 예수님이 가신 길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본 환상처럼 마른 뼈로 가득한 골짜기는 지금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죽음만이 뒹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이 희망의 내용으로 담겨져 있는 그는 마른 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만약 그런 세상을 희망으로 삼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마른 뼈의 모습이며 또 우리가 이런 마른 뼈의 상태로 있다면 우리에게 부활의 영을 주시고 산 자가 되게 하신 생명의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삶은 현실에 따라 염려와 불안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고 말합니다. 13절에서도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보고 여호와를 알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행하신 일의 핵심은 살리는 능력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호와만이 생명의 근원임을 아는 것이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여호와를 어떻게 아십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여호와를 아는 문제를 난감해 합니다. 우리의 손에 잡히고 느낄 수 있는 실체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되어지는 일과 자신의 문제에서 여호와라는 존재를 알고 확인하고 싶어 하지만 그 또한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기대하는 일을 통해 자신을 알게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답은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이 마른 뼈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른 뼈임을 알게 될 때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신 그 모든 일이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생명의 사건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며 생명으로 인해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활을 알고 여호와를 아는 신자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신자는 생명을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생명의 사건이 기쁨으로 그 속에 자리한 신자는 더 이상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주의 영으로 다시 살린바 된 부활을 경험한자 되었다면 우리는 세상의 것을 소망하지 않으며 또 세상의 것으로 우리 자신을 포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삶에 과연 내가 부활 생명을 누리고 사는 자인가 이것으로 점검하시어서 돌이킬 자는 돌이키는 은혜가 또 누리는 자는 감사의 찬양이 넘치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생명 신앙에서 멀어져 종교적 신앙을 갖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부활 신앙이란 무엇이며, 부활 신앙이 가진 자답게 살지 못한 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골짜기 가운데 가득한 마른 뼈는 무엇을 상징한다고 합니까?
4. 하나님께서 마른 뼈의 환산을 에스겔에게 보여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의 영으로 산 자가 된 자가 선악과를 따 먹은 까닭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의 모습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6. 하나님의 영이 있는 자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7. 오늘날도 믿는다 하면서도 오늘 본문의 마른 뼈와 같은 자는 어떤 자들이라고 하며 또 그런 자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8. 여호와를 아는 신자란 무엇이며 또 부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