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 / 마가복음 2. (막 1:2-8) 광야에서의 요한의 외침과 세례

by 관리자 posted May 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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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광야에서의 요한의 외침과 세례

본문 / 1: 2- 8

 

1. 익숙함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우리 모두에게는 아주 익숙한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익숙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여기게끔 하는 위험성이 크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처음 운전면허증을 받게 되면 운전이 서툴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인정을 하기 때문에 긴장을 하고 아주 주의하여 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운전에 익숙해진 자신을 보면서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되고 결국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면 자신의 운전 실력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주 알 아는 내용이라는 것이 그 내용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경우가 많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는 과거의 깨달음과 동일한 깨달음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건과 형편을 통해서 그 깨달음의 범위와 깊이는 항상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성령이 우리를 어떤 깨달음으로 이끌어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잘 안다 또는 잘 모른다는 것을 떠나서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마가복음은 그 시작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기보다는 마가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아감으로써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승리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신자의 현실

오늘 본문을 보면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1:2-3)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광야에서 외치느냐는 것입니다. 소리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어야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로 들어가서 외치는 것이 광야보다는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외치는 자는 도시가 아닌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광야에서 외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나와서 거주했던 곳이 광야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광야에 대해서는 신명기 8장에 보면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8:14-15)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지나게 하심은 이스라엘을 낮추시며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음을 증거 하였으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잊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이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82절부터 보면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8:2-4)고 말씀합니다. 광야가 비록 위험하고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이라도 이스라엘은 그 광야에서 매일 일용할 양식과 마실 물을 공급 받았을 뿐만 아니라 광야생활 사십년 동안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는 삶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아가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시고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의 그 일을 통해 자신들에게 힘이 되는 분은 오직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 뿐이라는 것을 알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먹을 것이 부족하고 생활환경이 열악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이스라엘의 그 열악한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나오게 하신 것은, 그들을 다시 애굽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애굽의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애굽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애굽이 아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거할 자가 되기 위해 광야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힘이 되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외친다는 것은 땅의 것을 힘으로 삼는 세상, 즉 애굽에서 나와서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광야에 서서 그 소리를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소리가 증거 하는 그 분이 힘이 되는 다른 세상의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증표인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현실에 대해 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자신들이 먹었던 것을 광야에서는 먹지 못한다고 하는 현재에 대해 불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불평은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16:2-3)라고 하는 말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가나안과의 접경지대인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거할 그 약속의 땅을 정탐하게 한 후 그들의 보고를 듣은 이스라엘은 민수기 14장에 보면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14:1-4)라고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인도하고 또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 지금까지 살아 왔고 또 지금도 살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보지 못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은 우리 역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그 일하심의 증거물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기 위해 일하시는가에 대해 상고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참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를 마음에 소망으로 삼고 사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이야 말로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굳은 의지와 결심 그리고 계획을 보여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해야만 하는 신자가 눈에 보이는 현재의 삶에 마음을 두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참된 현실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여기며 그 삶에 더욱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처럼 애굽의 것을 먹지 못한다는 것에 불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님 이야기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재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현실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실이 우리의 시각으로도 우리의 현실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한 신자에게는 자연히 그리스도가 힘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에게 과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참된 현실을 보기보다는 다만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뿐입니다. 성경을 펴 놓고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참된 현실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세상의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야 말로 우리들에게는 현실적인 이야기이며, 삶의 지혜가 아닐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3. 세례

그래서 오늘 본문 4절부터 보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1:4-5)고 말합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남을 뜻합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세례를 받으면서 물에 잠긴 죽은 몸의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위로와 힘이 되지 못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나를 살리시는 분이 있다면 그 분이야 말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고, 우리의 기쁨이며 힘이 되는 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결국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것은 죽은 자의 상태에서 주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도 이러한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10:1-2)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세례를 통해 모세와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세례를 받고 죽은 몸의 상태에서 광야를 지났다면 그들은 그 광야생활을 통해 자신들을 인도하시고 붙드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죽은 몸의 상태가 아닌 살아 있는 자로서 살다보니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공급하심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에게 남은 것은 불평과 불만뿐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애굽에서 살 때보다 더 풍요롭게 해 주지 않는다는 불평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주와 함께 죽은 몸으로서가 아닌 나는 살아있다라는 차원에서 주를 바라보기 때문에 살아있는 나를 믿기 전보다 더욱 잘 살게 해 줄 것을 소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똑같은 불평만 늘어놓으며 틈만 나면 애굽으로 돌아가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그것을 힘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힘 되시고 능력되심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세례 요한을 앞서 보내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7절부터 보면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1:7-8)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은 회개의 세례는 전파할 수 있었지만 죄를 사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오직 자신의 뒤에 오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신자에게는 예수님만이 죽은 자신을 살리시는 능력의 주님이고 또 소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나 승리의 기쁨과 감격과 같은 모든 것들은 자신의 죽음을 아는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는 신자에게는 애굽의 것이 없는 현재보다는 나는 죽었고 오직 주님만이 죽은 나를 살리신다는 현실이 그리고 그런 나를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루시고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이런 신자에게 만이 예수님은 희망이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주와 함께 죽은 자만이 주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와 함께 죽은 자의 시각에서 주를 만나며 또 주와 함께 살아남으로 인해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자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바 된 것들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며 그 은혜에 기뻐하는 날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삶만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는 아름다운 삶이 되는 줄로 알아 매일 주의 은혜와 사랑의 통치와 다스림을 통해 그 일이 우리 가운데 아름답게 성취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복음에 대해 익숙하다는 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러면 안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가운데서 누리게 되는 복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중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힘이 되실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외치는 자의 소리를 광야에서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5. 어떠한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가 힘이 되신다고 합니까?

6. 세례는 무엇을 의미하며 또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애굽한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평불만을 갖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어떠한 자에게만 예수님이 희망이고 또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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