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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의 실체와 하나님의 목적

본문 / 7: 9-23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9-23)

 

 

1. 불가능한 일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세 가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피부색을 가진 자들을 황인종과 백인종 그리고 흑인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피부색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피부색이 싫다고 해서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 예레미야서에도 보면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13:23)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스인은 오늘날로 하면 북아프리카에 있는 이디오피아를 말합니다. 결국 흑인이라는 것인데, 그 흑인들이 자신들이 싫다고 해도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악에 익숙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불가능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와 같이 이런 가능한 일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더러운 자가 거룩하고 깨끗한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이 선행을 행하면 깨끗한 자가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평생 선을 쌓고 산다고 해도 사람은 여전히 더럽고 악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바라보시는 시각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나누었던 말씀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등의 정결 규례를 지켜 행하면 그것이 곧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거룩의 문제가 그러한 사람의 계명과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인간의 실체인 것입니다.

 

2. 더러움

오늘 본문 15절부터 보면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7:15-16)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란 음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9절에서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7:19)고 말씀하는 것처럼 음식을 먹으면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배에 들어가 결국 뒤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더러움은 마음과 연관된 것이지 배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쓰레기통에 있는 것을 주워 먹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러면 배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악한 생각이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에는 이미 악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고, 수시로 그 악한 생각을 끄집어내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0)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21절부터 보면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7:21-22)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더럽게 하는 실체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이러한 악한 생각을 담아두고 살면서 수시로 악한 것들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더러운 것이 나오고 있는데,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다스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도를 닦고 고행을 하고 별 짓을 다한다고 해도 그러한 행위들이 우리 마음에 있는 악한 것을 쫓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있는 악한 생각은 마치 흑인이 태어나면서부터 검은 피부색을 갖는 것처럼,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악한 생각이 가득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인간은 그 마음 자체가 더러운 자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음으로 사람이 성결해 질 수 있다고,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은 오늘날의 교회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성화에 대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신자는 거룩하게 살아감으로써 점차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변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화되기 위해 Q.T도하고 기도하면서 자신을 다스리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뿐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얼마든지 변한 듯한 모습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곧 속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 속은 우리가 그 무엇을 해도 변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외식이라고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속과 겉이 다르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대표적인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3:25-26)고 하며 그들을 향해 진노하십니다. 우리의 겉은 얼마든지 변한 것처럼 꾸밀 수는 있지만, 우리의 속은 꾸밀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그 꾸밀 수 없는 속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변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속이며 그리고 그 속은 항상 더럽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그러한 행위와 앎으로 인간이 성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믿음과 함께 거룩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가르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라는 말만 할 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성화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과 실천으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이 중에 하나라도 있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평생을 산속에 살면서 묵상을 하고 도를 닦아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이 중에 하나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움도 음란도 탐욕도 우리의 힘으로 없앨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결국 더러운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인이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인이고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앎은 내가 죄인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속에서는 나의 의를 확보하려는 욕망이 튀어 나오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쪽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나는 죽어야 할 자입니다.’는 고백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에 좀 더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나는 죽어야 할 자입니다는 생각이 살아있고. 자신을 죽어야 할 멸망의 자식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곧 신자의 변화이고 달라짐이며 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굳이 성화를 말하려면 이것을 성화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목적

신자가 성경을 보는 것도 이러한 진리를 깨닫기 위함이고 기도를 하는 것도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면서 하나님의 의만 바라보는 기적의 사람으로 사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고 Q.T를 한다면 그것도 역시 죽은 자라는 인간의 실상을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악하고 더러운 자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십자가 아래서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여태껏 나의 체면과 자존심을 생각하며 나를 높이 세우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야 말로 더러운 인생이었음을 자각하게 되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생각하기보다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서 내가 나의 자존심으로 붙들고 있고 또 체면으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을 잘라내더라도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 깊이 깨닫고 그 은혜로 인해 눈물 흘릴 수 있는 신자로 고쳐주시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인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 말씀인 9절에서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7:9)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오늘 본문에 보면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기만 하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르반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이중으로 돈이 지출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을 지키면서 스스로를 거룩하게 만들려고 애를 쓴 사람들의 그 속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라도 자신의 것은 손해 보기 싫어하는 탐욕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탐욕으로 가득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17:9)고 말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상 사람은 거짓되고 부패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으로도 정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이러한 악한 마음이 정화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서 하시는 일은 우리 속에 있는 악하고 더러운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악하고 더러운 존재임을 보게 하셔서 하늘의 의로 오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더러움은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깨끗해지려고 힘쓰면 힘쓸수록 힘만 들고 낙심만 있을 뿐입니다. 무엇을 해도 마음의 더러움은 빛깔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한 이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늘의 한 의를 세상에 보내시고 더러운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담당케 하시고, 그 흘린 피의 거룩함을 보시고 우리를 거룩하다고 여겨주십니다. 한마디로 더러운 자를 더러운 자로 보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안에서 더러움이 씻겨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주어졌기에 신자는 모든 것을 받았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가장 귀한 복으로 높이며 그 생명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되어진 신자의 거룩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나는 거룩한 자다’ ‘나는 의인이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신을 거룩하다고 여겨주신 그 은혜가 누구로부터 주어졌는가를 바라보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인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받은 선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더러운 자가 감히 받을 수 없는 하늘의 거룩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마음이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고 성령이 역사하는 증거이며 흔적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교인들의 마음은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해 있습니다.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대신 달리신 예수님에게로 그 마음이 향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더러움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존심과 체면을 위해 예수님의 귀한 이름을 부르는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자신을 보면서 생각하십시오. 기도하면서도 나오는 것이 무엇이고, 성경을 보면서도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시고 인간은 더러운 존재에 불과하며 세상과 함께 소멸되어야 할 멸망의 자식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는 복이며 은혜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그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로 살게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 되어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오직 이런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실 수 있는 은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간은 어떠한 존재라고 합니까?

2. 사람이 더럽다는 것의 실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3. 사람이 더러움을 알면서도 깨끗해 질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4. 깨끗함에 대한 우리의 착각은 무엇이며 또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인간이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더러운 인간이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7.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는 어떤 신자라고 합니까?

8. 나님을 섬기고 신앙이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우리들의 속은 무엇으로 가득하다고 합니까?

9.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더러운 우리 심령에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신자가 신앙 안에서 지향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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