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은혜로 우리를 양육하시는 하나님
본문 / 딛 2:11-14
1. 성경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무리를 성도라고 하는데 성도란 말 그대로 거룩한 무리를 말하며 그리고 그 거룩이란 바로 세상과 구별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디도서를 통해 그 당시의 시대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그레데 사람들만 거짓말을 하고, 악한짐승이고, 자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는 아니라 오늘 이 시대도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 이후로 항상 거짓말만 하고 있는 자들이며, 주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니 악한 짐승이며,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영광이 목적된 자들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영광이 우선이니 결국 자기 배만 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 아비는 마귀”(요8:44)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그 유대인들이 얼마나 정직하고 바르게 살았습니까?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할 정도이면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얼마나 열심히 지켰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국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그런 유대인들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들의 모든 말과 일이 다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기들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며 자기들은 정직하다고 여기고 있으니 실상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마귀가 그들의 아비가 되어 있기에 세상에서 아무리 진실하고 바르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께 의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디도서를 보내며 그레데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다르게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 그리고 종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씀의 내용들 중에 과연 우리들의 마음에 흡족할 정도의 내용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마음에 흡족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부반응이 나왔을 것입니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절제과 경건 그리고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여자는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집안일을 해야 하느냐고 따지고 싶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종들은 자기 주인에게 범사에 순종하라는 말이 통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우리 마음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누구의 간섭도 싫은 것입니다.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회사의 상관도, 학교의 선생님도, 교회의 목사도 나를 짜증나게 하면 그냥 싫은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주고, 알아주고, 위로하여주고, 사랑하여주면 좋지만 나에게 부담이 되고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라면 다 싫은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살고 있는 것은 마지못해 타협하며 살고 있는 것이지 현재의 상태에 정말 만족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섬기는 자세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런 내용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말씀대로 살아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중에 구원에 이를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혹 이러한 말씀을 모두 다 지켜서 구원에 이르고자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구원받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영생에 관한 욕구는 다 있는 것입니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자기존재의 영원성과 발전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자체가 인간은 이미 구원에 이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과는 상관없이 죽은 자로 살고 있으면서 그 죽음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성경은 단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을 살아가는 것을 생명을 가진 것으로 인정하지 않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죽은 자라고 말씀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그런 인간이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는가를 밝혀놓은 구원의 비결이 담긴 책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일을 하시는지를 밝혀놓은 계시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시고 양육하실 것인가를 계시하신 내용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 버릴 것과 취할 것
오늘 본문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딛2:11-12)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말씀은 만민 구원설이 아니라, 이제는 인종이나 신분의 차별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시 유대인이 가진 구원관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잇는 구원관이 다름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아주 특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 이 복음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그 어떤 외적인 조건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모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도 이러한 은혜가 때가 되매 나타나 이 복음의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그리고 구원 이후에도 우리의 힘으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역시 은혜로 우리를 양육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되었고, 자라는 것은 너희의 노력과 책임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라는 것도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새 번역 성경으로 보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총은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건함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또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된 소망을 갖게 합니다.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딛2:11-14 표준 새번역)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며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은혜로 양육하시는 내용과 방향성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2:12-13)라고 합니다. 그 은혜의 양육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까?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알게 하심으로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버릴 것이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을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날마다의 욕구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다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하루라도 떠나본 적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루는커녕 한 시간이라도 경건치 아니함과 세상의 정욕을 버려보신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겨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고 관심가지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취할 것이란,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을 평소에 생활신조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늘 살고 있는지 또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면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 있다면 그 있다는 것도 세상의 정욕을 따라 가려다가 보니 뱁새가 황새를 좇아가는 기분이 드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그놈들은 심판하여 버리고 나는 영광스럽게 해 달라는 심보는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꼭 반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살라고 하는 내용과 방향은 버리고 싶고, 버리라는 삶의 내용과 방향은 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세상을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힘과 우리의 결심과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3. 은혜의 양육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16-26)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등장하고 있는데 우리에게서는 아마도 육체의 열매가 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체의 열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길거리를 가다보면 두더지 잡기라는 게임이 있는데, 열 개 정도 되는 구멍에서 두더지가 쉴 새 없이 튀어 나오면 그 튀어 나오는 두더지를 망치로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락의 천재라 할지라도 그렇게 튀어 나오는 두더지를 모두 다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만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게임과 같은 원리가 우리 몸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구멍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몸에서는 쉴 새 없이 육체의 열매가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망치를 가지고 전부 다 잡으려고 해도 만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적으로 보자면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다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를 때려서 잡으면 다른 곳에서 두세 마리가 동시에 튀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때려서 들어간 것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그냥 있으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때려서 들여 보내놔도 다시 또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의 현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양육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은혜의 양육을 받아야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은혜가 양육하는 내용과 방향이 우리의 본성으로는 거슬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혜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은혜가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저 자기가 살아가는 일에 도움이 되고, 일이 잘 풀려지는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은혜를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혜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본성적으로 거부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가 있냐고 말을 하겠지만 그러나 은혜로 양육하는 내용과 방향이 우리의 본성과 얼마나 거스르고 있는가를 안다면 이제는 조심스럽게 은혜를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이 말씀 앞에 솔직하게 드러내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로 양육하시는 것이 정말 좋습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복된 소망으로 살아가시기를 정말 좋아하십니까? 내 자신이 또 우리 자녀가 이러한 말씀대로 살기를 정말 원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 선뜻 동의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하시는 것은 우리의 이러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이루어 내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능력으로 양육하시는 것인지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시는 능력으로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주님께서 죄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 살고 있던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구속하여 내셨기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인하여 불러내신 것이기에 실패하도록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러내셔서 깨끗하게 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던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서 우리를 불러내심은 이제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열심히 가게하시기 위해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 길은 지금의 세상에서 새로운 삶의 세계로 인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시고, 영원한 것을 사모하도록 우리를 양육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을 목숨처럼 붙들고 있으면 그것을 포기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각 제 길로 간 자들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셔서 결국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양육은 이러한 삶의 목표를 놓치지 아니하고, 성도의 복된 소망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양육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 아래 있음을 우리 모두가 바르게 아시고, 헛된 것들에 마음과 몸을 빼앗기지 마시고, 오직 주님의 양육을 감사함으로 받으시면서 주님의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양육 받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살펴보고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
3. 유대인들의 구원관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구원관은 어떻게 다릅니까?
4. 은혜로 양육하시는 방법이 어떤 것이며 또 그 양육하시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5. 우리가 안다고 해도 우리의 힘과 결심과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알면 싫어할 수밖에 없는 까닭과 그 은혜의 능력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우리를 은혜로 양육하시는 능력은 어느 정도의 능력이며 또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드시는 능력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