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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이 작은 자의 의심

본문 / 14:28-33

 

1. 신앙의 확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증거하는 복음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 보면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는 말을 하는데 바울의 이 확신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3-28)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당한 고난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날 우리처럼 고난을 피하게 되는 체험을 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에 대해서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울과 우리는 뭔가 다른 차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적으로 생각한다면 바울이 신앙적으로 우리보다 더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믿음과 확신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 나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면 예수님과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믿고 확신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과 바울처럼 직접 음성을 듣는 것과 차이를 둔다면 결국 자기 체험을 믿는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바울이 복음을 확신하는 이유가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체험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바울은 자기 체험을 증거 했을 것입니다. 자신처럼 음성을 직접 들어야 한다고 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체험조차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의 확신은 체험에 있지 않고 말씀에 대한 믿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믿음이 바울을 확신에 거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과 같은 확신에 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적을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짐을 믿지 않음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과 우리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베드로의 믿음과 의심

오늘 본문에 보면 물 위를 걷다 빠진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의심하지 않았다면 계속 물 위를 걸었을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위해 의심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설사 물 위를 걷는 기적이 아니라 해도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의심을 버리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지만 그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과연 의심을 버릴 수가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도 의심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는지? 또는 천국은 존재하는지? 등의 많은 문제에 대해 때때로 의심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럼에도 우리 자신에게 의심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의심을 불신앙으로 간주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분위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님의 존재에 의심을 갖는 것을 신앙인으로서 믿음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의심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개의 기독교인은 성경 말씀을 의심 없이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물론이고 천국과 지옥도 믿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 믿음과 상관없이 산다고 해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상과 똑같이 보이는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뜻을 세우기 위해 살아갑니다. 천국을 믿는다면서도 삶의 방향과 초점이 오직 세상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존재와 천국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아니라 자기 확신의 수준이라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듣고 배운 내용들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세뇌된 상태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자기 확신의 수준에서 벗어나 믿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14:28)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예수님인 것을 알았고 또 자신도 물 위로 걷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예수님께 예수님 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도 거의 그런 형태와 내용으로 행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서 말하는 나를 명하사나에게 말씀하사라는 뜻입니다. 즉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자신을 물 위로 걷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생각이라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즉 물 위로 걷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자신을 붙들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 예수님께로 가게 된 것도 자신에게 물 위를 걸을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옳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게 되고 물에 빠져가게 된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한 것은 바람으로 인해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한 것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물 위를 걷게 하는가를 잊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고 있는 베드로는 말씀이 능력이 되어 베드로를 물에 빠지지 않도록 붙드는 예수님의 세계에 있습니다. 물 위를 걷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부는 현실로 인해 예수님의 세계에 붙들려 있는 참된 세계를 잊은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입니다.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환경적인 어떤 문제에서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세계로 이끌려 있다는 것은 생명의 세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에도 무서워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죽으면 안돼’ ‘나는 성공해야해’ ‘나는 잘 살아야 해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믿어도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천국 갈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의심을 유발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찾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찾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믿어도 되는가?’라는 불안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확신을 가졌던 것은 나는 고난 받으면 안돼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에 고난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잊으면 안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천국에 갈 자격이 있는가?’ ‘나는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나는 고통 없는 편안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가?’라고 하는 이 물음에 대해 답을 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기준으로 하지 말고, 날마다 내 뜻을 위해 탐욕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 현실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에게 내릴 수 있는 답은 나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에게 주어질 것은 심판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찾아오셔서 나로 인해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향해 죄 없다고 선언하셨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과 형편에 있던 상관없이 분명한 현실은 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3. 의심과 믿음

사람들은 인생에 바람이 없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목적으로 교회를 찾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신앙 행위라는 것을 하기도 합니다. 바람이 잔잔할 때는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바람을 보며 무서워하게 되고 그것으로 내가 믿음이라고 생각한 믿음이 믿음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바람은 계속 불어올 것입니다. 바람으로 인해 삶이 흔들리고 두려움과 염려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신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 힘으로 내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에 붙들려 이끌려 왔습니다. 그 어떤 바람이 분다 해도 신자에게 참된 현실은 말씀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붙들려서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말씀에 이끌려 가는 길이 우리의 본성이 추구하는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예수님이 가신 길로 이끌어 가고 그 길에 순종하게 하기 때문에 고난은 반드시 있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현실임을 안다면 어떤 형편에서 의심 없이 주만 바라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8-29)고 말씀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바람이 불고 흔들리고 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아래 되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허락 아래 된 일이라면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일들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느낌보다는 하나님이 언제나 옳음을 인정하며 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예수님을 찾지 마십시오. 그것이 곧 의심입니다. 행복하고 기뻐할 자격이 없는 나 같은 자에게 찾아오셔서 함께 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인해 물 위를 걷을 수 있었던 베드로처럼 존재하는 나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이 아닌 주의 말씀만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알게 되고 믿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이 믿음의 통치와 다스림을 누릴 수 있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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