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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버지가 이끄시는 은혜

본문 / 6:4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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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에베소서 1장에 있는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4-6)라는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면 그리고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셨다면 결국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단지 이 땅에 세상을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과 연결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사 아들로 삼으시는 일은 창세 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창세 전에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창세 전에 계획된 일이라면 우리가 한가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세상에 있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창세 전부터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짓기 전의 인간은 생명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주어지는 은혜인 것이지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생명에 대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의 있었던 어떤 일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구약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지만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십자가의 사건을 전제하고 율법을 대한다면 결국 율법은 인간의 죄악과 무능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실제로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길로써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행하신 신비한 이적을 직접 목격을 한다면 평생 예수님만 믿는 믿음으로 살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이적을 베푸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이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을 책망하는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른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무엇을 목적하고 따르느냐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육신의 유익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자들은 많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고 따르는 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전제한다면 이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기 위한 도구로 행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행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적을 왜 행하신 것입니까? 이적이 우리의 구원에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왜 이적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적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이적을 통해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적에서 단지 신비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볼 수 있는 자가 바로 믿음이 있는 자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이유는 신자의 존재 의미에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그리스도의 일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엉뚱한 일을 하면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이런 마음으로 주의 거룩하신 말씀 앞에 서서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오직 은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신자에게 뭔가를 주시기 위해서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를 주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면 그 상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언제나 하나님에게 받을 것만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에서 신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주셨습니다. 하늘의 생명을 주심으로서 그 생명을 세상에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을 주시고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44절에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그리스도에게 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이적을 목격하고 체험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힘으로 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인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앞 36절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6:36)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너희란 오병이어의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의 행하심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기독교에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종교와 다른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모두가 자신이 신을 선택하고 자신이 믿어서 구원에 이릅니다. 선택과 구원이 모든 자기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구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은혜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애당초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선포해 버립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시는 놀라운 이적을 보고서도 믿지 않는 것이 인간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성경은 믿음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은 우리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절감할 때 상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높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힘과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증거물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는 스스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없는 무능하고 강퍅한 인간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는 신자에게서 높여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인간의 죄악됨과 무능함에서 빛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인간이 믿게 된 것,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이끄심의 결과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끄심을 아는 신자는 믿음을 내세워서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끄심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믿어서 구원을 얻은 줄로만 압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감사함이 없습니다. 있다면 믿음을 비교하면서 경쟁하고 싸우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으라는 권면을 하지 않습니다. 믿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할 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루어주시는 복으로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믿으라고 말씀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믿을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가 믿음을 선물로 준 자기 백성들에게 대한 권고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믿으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모른다면 그는 믿음의 가치를 모른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세상이 받지 못한 것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은 세상의 멸망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죽어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죽어서 알게 된다는 것은 더 이상의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부자는 나사로가 알았던 것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부자의 눈에 보인 것은 단지 병들고 거지인 나사로의 모습뿐입니다. 나사로가 천국을 소망했다 하더라도 부자에게 의미 있는 것은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부자가 죽고 나서 비로소 내세를 알게 됩니다. 하지만 내세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부자가 목이 마를 때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까지 거절되는 곳이 음부입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서 남은 형제들이라도 자기가 있는 음부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죽어서 음부에 간 부자로서는 그러한 고통의 내세를 몰랐다는 것이 후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 살았던 것처럼 내세를 모르고 사는 자기 형제들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내세를 알고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게 된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신자의 배움

오늘 본문 45절에 보면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6:45)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성경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를 직접 우리의 삶에서 배우게 하십니다. 즉 머리로만 배우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에게 감사할 것은 신자는 인생을 살며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게 해주십시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복된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합니다. 자연히 그리스도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힘만 바라볼 뿐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다고 해서 세상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하시면 안됩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신분으로서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지만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더 나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가르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시는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실패 속에서 주님을 의지하게 해달라는 고백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 됨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 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참견과 간섭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풍성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시고 믿을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믿는 자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에 깊은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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