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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본문 / 5:10-12

 

1. 핍박을 받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누리는 복의 마지막을 핍박을 받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천국이 핍박을 받은 자의 것이라면 핍박을 받지 않는 자는 천국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아마 우리에게는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에서의 신앙생활은 핍박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핍박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실감 있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감시를 피해서 몰래 예배를 드리며 나도 핍박을 받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국가가 종교를 인정하고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천국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의 것이라는 말씀은 사실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결국 핍박을 찾아 나서든지 아니면 일부러 핍박을 받을 상황이라도 만들어야 할 판국이니 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또는 시부모에게 시달림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러한 것을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핍박이라면 핍박은 신자가 받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신 핍박이 신자라면 누구나 받아야 하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가정적인 시달림을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의 한 부분으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핍박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슬람권에 선교를 나가서 붙들려 순교를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오늘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핍박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을 신자가 누리는 최고의 복으로 알고 믿으며 또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고 그 길로 인도받기를 갈망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물음부터 자신에게 솔직히 던져 보아야 합니다. 핍박을 받는 것을 신자의 최고의 복으로 여기지도 않고 또 핍박을 받고자 하는 마음도 없으면서 나는 지금 핍박을 받고 있는가 받지 않고 있는가의 문제를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쩌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가운데서 핍박을 받는 문제가 가장 마음이 와 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령의 가난, 온유, 화평 등등의 말씀들은 모두 내적인 것이고 신자의 마음가짐의 문제로 여겨지는데 반해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실제적이고 자신이 직접 겪어야 하고 당해야 하는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결국 핍박을 받는 것을 제외한 다른 복들은 자신에게 고통과 손해를 주지 않는 것이지만 핍박을 받는 것은 고통과 손해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장 꺼려하고 마음이 와 닿지 않고 피하고 싶은 복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복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복은 항상 자신에게 함께 해 주기를 갈망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데 마음에 와 닿지 않고 꺼려하고 피하고 싶은 것을 복이라고 여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느냐의 문제보다는 핍박을 진심으로 복으로 간주하고 믿고 소원하는가?’부터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왜 핍박을 받는가?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8-19)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이유를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택함을 입어 예수께 속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께 속했다는 것을 왜 미워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이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나 사회에서 왕따가 발생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학교나 사회라는 집단의 보편적인 질서나 방향에 거스를 때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시키는 것처럼 신자는 결국 세상에서는 왕따를 받아야 할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세상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신자는 이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즉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조차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만 신자는 자신이 예수께 속한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존귀한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속했다는 것은 자신이 참으로 존귀한 분에게 소속되었음을 의미하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세상은 이것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혹시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왜 아는 항상 이렇게밖에 못사는가?”라는 불만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여전히 세상과 같은 방향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뒤쳐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원망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열심히 예수를 믿었다고 해도 달라진 것은 없고 또한 예수를 믿은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로 세상이 가는 길과 같은 길을 달려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세상은 신자가 자신들과 같은 길을 가면 핍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조롱은 있습니다. 예수 믿어도 별수 없고 우리보다 돈을 더 밝히면서 비겁하게 스스로 노력할 생각하지 않고 절대자의 힘을 빌리려 한다는 조롱의 말만 돌아올 뿐입니다.

신자에게 예수님이 가장 존귀한 분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본 자가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보았고 죽음을 보게 됩니다. 때문에 생명이 되는 예수님의 의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 속한 자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기에 예수님을 존귀하다고 외칠 수가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와 긍휼의 은혜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인간의 의까지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인간도 얼마든지 선행을 할 수가 있고, 의의 행동을 할 수가 있으며 그것으로 하늘을 감동시킬 수가 있음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게 된 복을 누리는 신자는 오직 예수님의 의만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핍박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추기경 한 분의 죽음을 두고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애도하는 것은 그의 선행이고 그의 의의 행동입니다. 그도 역시 죄인이고 예수님의 의로써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의에 감격해하기 보다는 추기경이라는 한 인간의 선행과 도덕적 의에 감격해 합니다. 추기경의 의와 선행 앞에 예수님의 의는 이미 과거의 사건으로 묻혀 버렸고, 단지 현재의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도덕적 규범으로 치부될 뿐입니다. 이것이 여전히 예수님이 핍박을 받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은 그들의 의를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고자 힘을 썼고 도덕적 삶을 살고자 애를 썼던 그들의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단의 자식으로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신명기에서 나누었지만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신명기 9장에 보면 “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9:4-6)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약속에 땅인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어리석게도 자신들이 공의로워서, 정직해서 그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목이 곧은 백성의 모습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약속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지키고 성취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그 무엇이 원인이 되어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창세 전의 계획과 또 창세 전의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믿어서 또는 내가 뭔가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해서 천국 간다고 여깁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 지켜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내가 믿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한 열심히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자는 이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자기에게 그 어떤 원인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의만을 바라보는 신자가 세상을 향해 외치고 증거할 것은 인간의 선행도 의도 보람 있는 삶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긍휼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외침을 세상은 싫어할 뿐입니다. 그러니 신자에게 핍박은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핍박을 소원하라

그러나 이 시간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우리 모두에게 핍박은 거리낌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신자는 핍박을 소원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핍박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말을 이해하셨다면 신자에게 핍박은 특정 장소, 특정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자로 산다면 필히 따라오는 것임을 아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핍박을 소원하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그곳에서 예수께 속한 자로서 세상과는 다르게 사시면서 신자다움을 증거할 수 있기를 소원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의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소원하라는 것 때문에 어떻게 하면 핍박을 받을까를 궁리하면서 핍박을 받으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신자는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잊지 않고 세상이 달려가는 길이 아닌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는 신자로서의 길만 묵묵히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럼 내 인생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 없는 인생의 결말을 생각해 본다면, 그래서 세상에서의 풍족한 인생보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 예수 있는 인생의 길을 가는 것이 더 복된 것임을 믿는다면 그 모든 것은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의와 공평과 정직과 거룩으로 서로 사랑하며 신령하게 사는 것이 즐겁고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넓고 편안한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한 길을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가는 것이 정말 귀하고 귀해서 아무도 그 기쁨을 막을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핍박 가운데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자가 천국을 사는 재미로 이 땅을 살면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을 환난 가운데서도 기쁘고 즐거워할 일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고, 신자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하던 주님은 당신만의 선하신 뜻으로 함께 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생수의 강으로 인도하여 더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주님을 따라가며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기쁨과 즐거움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선하신 뜻으로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에 예수님은 살아 역사하는 분이 아니라 죽어 계시는 분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의 삶에 하나님의 선한 뜻이 드러나기를 바라지만,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질 최종적인 선을 이루시기 위해 합력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신자는 바로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이 힘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란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승리하고 있는 사람이지 최후에 보장된 승리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최후의 승리만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이 승리의 순간들입니다. 이 복된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핍박을 받고 욕을 먹어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만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복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복이 우리에게서 진심으로 참된 복으로 대접받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에 대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각각 독립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 백성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에는 세상이 기대하는 현실적 형통이 전혀 없음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복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께 속한 자가 되어서 자신의 영혼이 거룩하게 변화되며 이 세상을 영적인 시각에서 볼 줄 알게 되는 차원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알기에 그분의 긍휼함에 동참할 수 있는 은혜이고, 예수님의 의에 목마르게 되는 은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의로 배부르도록 채워주시며 결국 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핍박은 무엇이며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핍박이 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오늘 말씀의 의를 위한 핍박이 사실 인간들에게 복이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미워한다고 합니까?

 

4. 세상의 즐거움과 신자의 즐거움은 어떻게 다르다고 하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5.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오늘날 신자들이 세상을 향해 외칠 것은 무엇이며 왜 그것만이 신자의 외침이 되는 것입니까?

 

8. 신자가 핍박을 소원하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9. 신자인 우리가 현재의 삶이 힘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무엇이며 또 무엇이 없는 복이라고 합니까?

 

 

  1. 6월 15일 / 요한복음 79. (요 12:46-50) 선지자 예수님

  2. 6월 15일 / 마태복음 27. (마5:17-20) 율법의 요구

  3. 6월 8일 / 요한복음 78. (요 12:44-45) 주를 보는 자 하나님을 보는 자

  4. 6월 8일 / 성령강림주일 / (행 2:1-13)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5. 6월 1일 / 요한복음 77. (요 12:37-43) 믿는다는 것

  6. 6월 1일 / 마태복음 26. (마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7. 5월 25일 / 마태복음 25. (마 5:10-12) 의에 주리고 핍박을 받는 자

  8. 5월 18일 / 요한복음 76. (요 12:31-36) 죽으시는 한 알 하늘 밀

  9. 5월 18일 / 마태복음 24. (마 5:9) 화평케 하는 자

  10. 5월 11일 / 요한복음 75. (요 12:27-30) 아들을 영화롭게

  11. 5월 11일 / 마태복음 23.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

  12. 5월 4일 / 요한복음 74. (요 12:25-26) 자기 생명과 예수님

  13. 5월 4일 / 마태복음 22.(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

  14. 4월 27일 / 마태복음 21.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15. 4월 20일 / 부활주일 / (롬 6:1-4) 죄와 세례와 새 생명

  16. 4월 13일 / 요한복음 73. (요 12:20-24) 한 알의 밀이 죽으므

  17. 4월 13일 / 마태복음 20. (마 5:5) 온유한 자

  18. 4월 6일 / 요한복음 72. (요 12:9-19) 나귀를 타신 예수님

  19. 4월 6일 / 마태복음 19. (마 5:4) 애통하는 자

  20. 3월 30일 / 마태복음 18.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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