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보복이 아닌 자비로
본문 / 마 5:38-42
1.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살인에 대한 계명에서부터 계속 등장하는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기존의 하나님의 계명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는 형식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해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 또한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사람들은 이 계명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실행했을까요? 또 오늘날 우리는 이 계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자에 대해서는 정당한 보복을 하도록 허용을 하지만, 신약의 예수님은 보복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사랑을 하도록 가르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구약의 하나님은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까?
먼저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3-25)고 말씀합니다.
또한 레위기 24장에도 보면 “19.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출24:19-20)라고 말씀하고, 신명기 19장에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신19:21)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구약의 계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용서의 하나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를 끼치고 상하게 한 자를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악을 행한 자를 긍휼히 보지 말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이러한 계명을 말씀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계명을 대하게 되면 사람들은 누구나 용서와 자비보다는 보복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고 정의를 세우시기 위해 악에 대해서는 보복을 허용하시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나의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는 방식으로 이웃을 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말씀을 대하게 되면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의 판이하게 다른 가르침으로 인해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구약의 계명은 이미 예수님으로 인해서 파기되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계명이 파기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보복을 허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을 마치 하나님이 정당한 보복은 허용하심으로써 인간에게 악에 대한 심판을 허락하신 것처럼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자기 이해에 맞게 해석해 버린 결과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그러한 식으로 해석을 하여 악에 대해서는 자기들 멋대로 해석한 하나님의 계명을 기준으로 처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는 말씀으로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이 조상으로부터 듣고 배워온 계명의 의미는 잘못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버려라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39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5:34 상)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그러면 악한 자가 악을 행해도 그냥 놔두란 말인가?’라고 의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해서 말씀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교회를 다니면서 듣고 배움으로써 자신에게 익숙해져 있고 또 스스로 맞는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이 곧게 정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령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든가,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든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신자들은 앞서 말한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선행이야말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한다면 과연 그 말을 수긍하고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아니 어떻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가 있는가?’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뜻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한 부분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물론 구제하라는 말씀은 있습니다. 신명기 15장에도 보면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5:10)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절을 보면서 ‘봐라 하나님의 뜻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그것이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구제하라’는 말씀만 눈에 들어오게 되고 구제가 곧 하나님의 뜻임을 의심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말씀이 있으니 나에게 해를 입힌 자는 그대로 갚아주고 악에 대해서는 보복을 하고 심판을 하여서 정의를 세우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구제하라는 말씀은 단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다움이 무엇인가?’가 들어있습니다. 이스라엘다움이 무엇인가를 구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고, 이스라엘다움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씀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이 됩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씀처럼 우리도 나름대로 듣고 배움으로써 정립되어 있는 내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뜻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립되어 있는 기존의 하나님의 뜻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악한 자는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우리의 생각이 그러한 불만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악을 제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19장에 보면 “19.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신19:19-20)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대로 악을 행한 자가 있으면 그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습니다.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악을 제하라고 하신 것은, 악에 대해 정죄하고 심판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곧 악이요,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는 것도 악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악이 이스라엘 자신들에게 있음을 율법을 통해 깨닫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백성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의 악은 보지 않고 타인의 악만 바라보면서 정죄하고 심판하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이것이 악을 제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전혀 다른 이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9-42)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자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누가 자신의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돌려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한다면 누구나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보복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뺨을 때리면 수치를 참지 못하고 대항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을 송사하면 맞고소를 해서라도 상대방을 이기고자 합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힘들고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꾸고자 하는 사람도 그의 형편이 어려우면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방식입니다. 무엇에든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악으로 간주하고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는 보복이 없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관계되어 살아가는 나라인 것입니다.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악을 제하라고 하시면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악을 깨닫고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께 악을 행한 것에 대한 갚음을 받아야 할 심판의 대상임을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통해서 악을 행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깨달아야 하고, 자신이 심판의 대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대신해 고난을 받으시고, 하늘에 속한 영원한 복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고 그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인 우리를 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신자는 바로 이 복의 나라를 유업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나라를 살아가는 신자라면 마땅히 예수님께 받은 복으로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자와 자비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받은 복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자는 용서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또한 용서의 복을 주신 것은 신자를 용서의 증인으로 세상에 세우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복의 방식으로 이웃을 대함으로써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예수님의 용서로 대함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높이고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주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봉사와 헌신은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예수님이 베푸신 십자가의 피의 은혜의 고마움을 절감하는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자신에게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베푸신 십자가의 피의 은혜의 고마움을 아는가?’입니다. 아신다면 예수님께 받은 용서의 복으로 이웃에게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까?
2.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대할 때 마치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복을 허락하신 것처럼 여기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라고 합니까?
3.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가장 쉽게 범하는 잘못된 생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하나님께서 약속(은혜)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한 자들을 도와주고 구제하라고 하신 의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악을 제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과 의도는 무엇이며 또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다고 합니까?
6.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악은 무엇이라고 하며 또 그런 세상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과 관계되어 살아가는 나라는 어떤 나라라고 합니까?
7.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신자인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것은 무엇이고 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주께 봉사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