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병자와 예수님
본문 / 마 8: 1- 4
1. 무엇에 간절한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에 간절함이 있을까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의 간절함은 자식 문제와 돈 문제가 주를 이룰 것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자식 문제와 돈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자식의 성공은 부모의 소망이고 갈급함이며 행복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고 또한 사람이 꿈꾸는 풍요로운 인생 역시 돈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자연히 돈 문제에도 간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이런 말은 이제 너무 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뻔한 이야기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과 대비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나병환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나병은 하나님의 규례에 의해서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그런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나병환자는 가족과 유대인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생활했기 때문에 일반인으로서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2)라고 말합니다. 나병환자의 이 말에는 예수님은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말은 자신이 고침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오직 예수님의 뜻, 주의 원하심에 달린 것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혹시 예수라는 사람이 나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아니라 ‘예수님은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이다’라는 확신을 가진 상태에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향한 나병환자의 간절함은 참으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만 자신의 모든 인생이 정상적으로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병환자와 같은 간절함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나병환자가 아닌 사람들은 지금의 자신이 굳이 고침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의 자신은 저주받은 자로 취급되지도 않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에서 나병환자와 같은 간절함은 나타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실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나병환자입니까? 아니면 정상적인 사람입니까? 만약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으로 말씀 앞에 나온 것이라면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와 같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상태에서 주를 부르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우리의 실상일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나병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되어서 예수님께 나오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원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채우고자 하는 헛된 욕망을 간직한 채 예수를 찾는 수준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2. 나병환자가 되어라
나병환자처럼 나병으로부터 구원되고 깨끗함을 입는 기적을 맛보려면 필히 나병환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본문의 나병환자가 누린 기적의 참된 기쁨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은 나병도 낫게 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혹시 병에 걸려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면 고쳐주신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떤 병도 낫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신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우리가 나병환자가 되어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깨끗케 하심으로 누린 기쁨과 위로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나병환자가 돼라’고 하는 것이 일부로 큰 병에 걸려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병환자가 겪었던 것처럼 실제로 사회적으로 배척을 받아야 하고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나병환자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나병환자와 같은 상황을 일부러 조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다들 짐작들을 하실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증거하는 대표적인 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러한 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이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나누었던 예수님의 산상수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시는 천국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천국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상태는 예수님이 말씀한 복 있는 자와 너무나 달랐고 우리가 소원하고 구하며 살아가는 것 역시 천국 백성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멸망의 자식일 뿐이었습니다.
아마도 주님이 말씀하신 이러한 산상수훈이 없다면 우리는 그런대로 도덕과 윤리의 규범 안에서 착한 사람이고 그리고 교회가 정한 어떠한 규칙과 질서 안에서 신앙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우리를 저주 아래 있는 멸망의 자식으로 무너뜨려 버립니다.
나병환자는 그 몸 자체가 더러움입니다. 그 몸에서 깨끗함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만질 수도 없습니다. 만지게 되면 같이 부정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병환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 자체가 더러움이기 때문에 깨끗함은 나올 수 없는 저주의 자식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17장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합니다. 이것이 나라는 사람의 실체입니다. 이런 나에게서 날마다 삐져나오는 것이 사랑과 용서와 겸손이 아니라 분노와 시기와 보복과 미움뿐이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에 대해서 절망해야만 합니다. 나의 그 어떤 실천과 행함으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다가갈 수 없고, 조금이라도 깨끗해질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나병환자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병환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의 의를 향한 간절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한다는 단호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신자는 다른 의, 즉 예수님의 의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온 간절함인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세상의 무엇으로도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의 의가 아닌 무엇으로도 고침받을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생각한다면 자연히 예수님의 의를 향한 간절함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땅의 것을 얻기 위해 살아갑니다. 삶의 모든 목적과 방향이 오직 땅의 것을 향해 있습니다. 땅의 것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사는 이유이고 목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의 의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나병환자인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된다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는다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며 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부정한 존재며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을 깨끗케 하신 은혜가 그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3. 나병환자의 놀라움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를 깨끗케 해주십시오’라든가 ‘나를 고쳐주십시오’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2)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나병환자는 자신이 예수님께 어떤 요구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로서 자신이 깨끗케 된다는 것은 감히 기대할 수 없는 과분한 것이기에 다만 주님의 뜻에 맡길 뿐이라는 것이 예수님께 나온 나병환자의 태도였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를 보면 오늘날 우리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죄인으로서의 마음 자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르면서도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자녀로서 원하는 것을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특권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가령 대통령의 자녀가 대통령의 자녀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무작정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의 자녀라는 것이 원하는 것을 뭐든 얻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원하는 것을 모두 구할 수 있고 또 구하면 받는 특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사탄에게 속하여 살아가는 세상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주어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좇는 것을 좇지 않는 것이고, 세상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살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나병환자는 부정함의 대표자입니다. 저주받은 자로서 사회의 멸시와 조롱과 배척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안다면 ‘깨끗함’이란 나병환자로서 감히 넘볼 수 없는 다른 세계임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른 세계를 어떻게 당당하게, 마치 자신이 깨끗해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는 ‘원하시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뜻에 맡길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병환자의 놀라운 믿음인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바르게 알고 주님을 알기에 나올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당부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나병환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여 깨끗케 하신 다음에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마8:4)고 하는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았다면 빨리 가족에게 돌아가서 자신이 고침받은 것을 보이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주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도 간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고 다만 제사장을 찾아가라고만 하실 뿐입니다.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것은 나병환자가 깨끗해 졌을 때 그가 깨끗해졌다는 선언을 제사장이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제사장에게 보냄으로써 그리고 깨끗하다는 선언을 듣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나병환자인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또 깨끗하다는 선언을 하실 수 있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셨음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나의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이 사실에 감사하게 되고, 나를 깨끗하게 하시고 깨끗하다고 선언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이 사실이 참된 기쁨으로 담기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나병환자로 예수님께 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까? 나병환자가 고침받은 것에 대해 알리게 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나병이 고침받은 신기한 기적으로 향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나병환자가 되어서 나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병고침 받는 기적에만 관심이 쏠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나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에 마음과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가 깨끗하게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예수를 찾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거부하신다는 의미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런 뜻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자기를 향한 관심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 예수를 찾고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이것이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처지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자로 사는 것을 비참하게 여기고 불쌍한 처지로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42:1-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에 갈급해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주를 향한 갈급함이 있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나병환자라는 것을 드러낼 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나병환자라는 실상이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나를 차지하게 될 때 우리는 나를 깨끗케 하시는 주를 향한 갈급함으로만 주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양의 드리는 삶인 것입니다.
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의 그 당시의 현실은 어떻다고 합니까?
2. 오늘 본문의 나병 환자의 말에 담겨 있는 확신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오늘날 우리가 나병 환자와 같은 간절함이 없는 까닭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위한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만나는 사건이 산상설교 후에 등장하는 모습을 통해 알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말씀 앞에 선 우리가 나병 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6.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 앞에 선 나병 환자의 간절함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고 합니까?
7. 우리가 진정으로 주 앞에서 나병 환자가 되었다면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나병 환자의 주 앞에서의 바른 태도와 그리고 너무나 다른 우리의 태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10. 깨끗함을 받은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제사장에게만 보이라고 하시는 의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