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을 따르려면
본문 / 마 8:18-22
1. 예수님의 가치
미국에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억만장자인 워렌 버핏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부인인 수잔 버핏의 권유로 지난 2000년부터 매년 연례행사로 ‘버핏과의 점심’ 경매를 통한 기부를 지속해 오다가 2022년을 끝으로 이 행사는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이 행사의 최고 낙찰가는 마지막 경매 낙찰가인 1900만 달러(270억원)라고 합니다. 워렌 버핏이라는 사람과 3시간 동안 같이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따기 위해 그 많은 돈을 사용한 것입니다. 물론 같이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조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마지막 투자자는 워렌 버핏과 3시간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얻기 위해 270억을 투자한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저라면 돈이 있다고 해도 워렌 버핏을 만나기 위해 그러한 엄청난 투자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돈이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워렌 버핏이라는 사람과 3시간 점심을 하기 위해 그만한 돈을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워렌 버핏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그를 알게 되고, 그와 3시간 대화하는 것이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 있는 일임을 아는 사람만이 그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270억이라는 돈을 투자해서 웨렌 버핏과 점심을 함께 한 사람은 워렌 버핏이라는 사람의 가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연히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분으로 여겨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로 자리하고 있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수님도 또 예수님의 말씀도 어쩌면 우리에게는 나의 생존문제나 내 자식 그리고 내 가족보다 가치 없는 분이었을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물론 그것은 설교하는 제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낯 뜨거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설교를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목사는 목사 자신을 증거하고 또 목사 자신을 위해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설교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목사 자신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 설교하는 사람이 목사라는 것 때문에 저 역시 믿음 없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오늘도 성경 책을 펴고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했던 질문을 각자에게 한번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원론적으로 생각한다면 답은 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원론적인 생각 그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계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 투자가는 워렌 버핏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에게는 엄청난 돈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워렌 버핏과의 대화를 통해서 투자의 세계를 제대로 보고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투자자가 투자의 세계를 제대로 보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투자에 있어서 실패를 줄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워렌 버핏과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270억 원을 쏟아부은 것입니다. 이것은 워렌 버핏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입니까? 워렌 버핏의 말이 돈이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이 됩니다. 결국 생명을 원하고 생명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은 존귀한 분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2. 거처 없는 예수님
오늘 본문은 앞에서 나병 환자와 백부장의 종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또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신 다음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마8:19)고 합니다. 한 서기관이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서기관으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기관은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제사장과 함께 지도자로 대우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서기관으로서의 모든 혜택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택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이 예수님을 좇고자 한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가르치신 말씀의 권세에 크게 감동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서기관으로서의 모든 지위와 권세를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좇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에 예수님을 좇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만 생각한다면 서기관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라는 답을 하십니다. 서기관과 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좇는다면 앞으로의 예수님의 일에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서기관의 제자로서의 합류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치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를 받아들이기에 형편에 좋지 않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집도 없이 가난하게 사는 고생길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만약 집도 없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면 자기 소유의 집이 있는 사람은 일단 예수님의 제자에서 제외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서기관이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것은 말한 대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말씀의 권세에 감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감동을 받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로 봤을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약에서 언약된 다윗 왕국을 세울 분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서기관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을 가치가 있는 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서기관이 예수님을 다윗 왕국을 세울 분으로 바라봤다면 한가지 잘못된 오해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다윗 왕국처럼 권세 있는 나라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서기관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서기관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권세가 있는 나라가 아니라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없는 나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자기 백성의 대표자로 오셔서 고난과 핍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처럼 많은 군사를 이끌고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를 쳐부수고 승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나라를 세우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힘에 의해서 핍박과 죽음을 당하시는 방식으로 세우신 것이 예수님이 세우신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씀도 인자의 나라는 세상과 상관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은 세상에 거처를 두지 않음을 뜻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어서 세상에 거처를 두고 있고, 새도 세상에 거처를 두고 살지만 인자는 세상에 거처를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두고 있는 나의 거처와는 상관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서기관은 그런 거처를 꿈꾸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는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그의 심령에는 여우의 굴도 또 공중의 새의 거처는 있을지언정 인자이신 예수님의 거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왕이신 나라인데 그 나라 백성은 되고 싶은데 그분의 왕으로서 주인으로서 거할 장소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서기관의 마음이고 또 오늘날 주를 믿고 따른다는 우리의 심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거처를 위해 예수님께 나올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만이 예수님의 말씀의 가치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의 자신의 거처를 더욱 탄탄히 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라면 생명을 위한 말씀은 자연히 관심 밖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죽은 자의 일과 산 자의 일
오늘 본문에 보면 서기관 말고 제자가 또 한 사람 등장합니다. 21절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8:21)라는 요청을 합니다. 돌아가신 부친의 장례를 먼저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제자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고, 따라서 잘못된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8:22)는 말씀을 합니다. 겉으로 보면 마치 부친의 장례까지 막으면서 예수님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는 부친의 장례식을 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자는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한가지 모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지만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장사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한 죽은 자는 육신이 죽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그 영이 죽은 자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죽은 자의 세상으로 보십니다. 죽은 자에게서는 필히 죽은 자로서의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썩어질 자신의 육체에 모든 관심을 두고 오직 육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이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육신이 세상의 것으로 치장되고 그래서 다른 죽은 자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그들 위에서 힘 있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인생의 성공으로 바라보며 살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이러한 죽은 자의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죽은 자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누가 과연 죽은 자의 세계와의 단절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그들은 바로 이 세상을 죽은 자의 세상으로 바라보는 눈이 있는 신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죽은 자의 세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만 이 세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곧 멸망임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희망은 자연히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구출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존귀한 분으로 자리하게 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또한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시간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것은, 죽은 자의 일과 살아있는 자의 일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일은 세상에서의 자신의 거처를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의 일은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알고 예수님만이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자기 거처가 관심이 아니라 자신의 거처를 예수님 안에 두고 오직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곧 자신에게 생명이라는 믿음으로 주께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환영하고 존귀하게 여길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저주 아래 있고 그 저주에서 벗어날 힘도 없어서 영원한 멸망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신의 실상을 깨닫는다면 자신의 연약함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담당하실 예수님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거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거처가 아무리 탄탄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죽은 자의 세상, 저주의 세상으로 바라보는 그들만이 예수님에게 마음을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거처는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가 떠날 곳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두게 하십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고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신자를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그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게 하십니다. 그러니 죽은 자들의 세상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고 산자의 세상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 우리의 삶에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합니까?
2. 오늘 본문의 서기관이 예수님을 좇겠다고 하는 근거와 또 그것이 대단하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을 좇겠다고 하는 서기관의 잘못한 오해는 무엇입니까?
4. 서기관이 꿈꾸는 나라와 예수님이 세우신 나라는 어떻게 다릅니까?
5.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6. 예수님의 시각에서의 세상은 어떤 나라라고 하며 또 그 나라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그런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예수님만을 존귀하게 여기고 예수님에게만 마음을 두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라고 합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