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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생명의 세계

본문 / 9:18-26

 

1. 인간의 습성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런 인간이기에 사람은 인간은 자신의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때문에 만약에 그런 사람이 성경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사람이 관심을 둘만 한 일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자신의 일은 모두가 세상일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자식 문제 등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관심거리와는 철저히 무관한 내용으로만 가득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봐도 세상을 사는데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에게 성경은 자연히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관심을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성경과 말씀에 관심을 가지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강조한다고 해서 마음을 고쳐먹고 성경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아실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열심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경, 즉 진리에 대한 무관심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무관심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세상에는 본래 진리에 대해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자기 관심 즉,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 진리에 관심을 둔 사람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진리에 관심을 둔 사람은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된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관여하심으로 되어진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채 살아가도록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관여하셔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엔진이 고장 나서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의 엔진을 새 엔진으로 교체하여 움직이도록 하는 것처럼 진리에 관심이 없는 마음을 진리에 관심을 가진 다른 마음으로 교체해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하면 진리에 관심을 가진 마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는 일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에는 진리에 무관심한 자신에게 찾아오셔서 자기 마음을 고쳐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관여하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잊고 살았던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의의 길로 붙들어 가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셔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신자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문제를 말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이 죽은 자가 살고 병으로 열두 해를 고생했던 병이 낫는 내용이라고 해서 지금 건강하게 살아있는 내 자신과는 무관한 이야기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겉으로만 보면 건강하게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내용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저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고 살자는 것이나 또는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있는 분이니 어떤 병에 걸려도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께 매달리자는 통속적인 해석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습성이라는 것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진리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유리하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시려는 것인지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생명의 세계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9:18)라고 말합니다. 여기보면 관리가 자신의 딸이 방금 죽었으니 오셔서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내용을 마가복음에서 보면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5:22-23)라고 합니다.

또 누가복음에도 보면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8:41-42)고 합니다.

이 두 복음서에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게 되었다, 죽어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것과 죽게 된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비록 중한 병이라고 해도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그래도 나을 수 있다는 기적과 희망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죽었다면 나을 수 있는 기적과 희망 모두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나을 수 있다는 기적과 희망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태인 죽은 자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찾아온 관리(회당장 야이로)는 자기 딸이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와서 몸에 손을 얹으면 살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죽은 자도 살리는 권세를 가진 분으로 믿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관리는 단지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자기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사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우리가 생각할 때는 놀라운 기적이지만 신앙의 문제에서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병이 낫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결국 죽을 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죽을 몸으로 살아난다는 것은 다만 목숨의 연장일 뿐이기 때문에 신앙의 문제에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수가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가 곧 생명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말이기 때문에 그냥 쉽게 흘려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말이라는 것과 그 말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무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생명의 문제보다는 현실(생존)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더 급박하기 때문입니다. 즉 생명이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서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밖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생명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세계에는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생명의 사건에도 무관심한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분명 예수님을 말하고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말만 있을 뿐 교회가 관심을 두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육관을 짓는 일에 매달릴 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교회를 곧 자신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면 외면을 받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로 여김 받으며 비웃음을 살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관리의 집에 가셔서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9:24)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피리 불고 떠들던 무리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분명 죽은 사람을 두고 잔다고 하시니 그런 반응도 당연합니다.

아마 관리의 딸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의사가 죽은 자를 진단하고 사망 선고를 하는 것처럼 숨을 쉬는지, 심장은 뛰는지, 여러 모양으로 확인을 하고 죽었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관리도 예수님께 자신의 딸이 방금 죽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두고 잔다고 하시니 무리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은 비웃지 않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을 죽은 자도 살리는 권세가 있는 분으로 믿고 예수님께 나아간 관리인 소녀의 아버지입니다.

이 관리가 예수님을 죽은 자도 살리는 권세가 있으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이상 딸이 죽어 있는 현실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한다는 것이 참된 현실이었고, 그 현실에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자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곧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생명의 세계에서는 죽음도 죽은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전부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세계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생명의 주로 인해 우리에게 벌어질 참된 현실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가령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든 가난한 사람에게 너는 부요한 자다라고 말한다면 자신을 놀리는 말로 듣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신자라면 분명 그는 예수님으로 인해 부요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처한 참된 현실임을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세상에서의 내 일이 아닌 진리에 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3. 혈루증 여인

그런데 예수님이 직원의 집으로 가실 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을 만집니다. 그 여인의 마음은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9:21)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고 말씀하셨고 그 여인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 내용 역시 마가나 누가복음에서는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을 수가 없었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허비해 버린 여인의 형편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단지 혈루증이라는 말만 합니다. 그 이유는 혈루증이라는 말만으로도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15:2)고 합니다. 여기 보면 유출병은 부정한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유출병은 오늘 본문의 혈루증으로서 결국 이 혈루증 여인은 구약적 시각으로 보면 부정한 여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루증이 있는 여인은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부정한 자는 하나님에게서 쫓겨나야 했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신 세계는 오히려 부정하고 더러운 자에게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의 규례 아래서는 혈루증 여인은 절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로운 세계는 악하고 부정하고 더러운 자들이 얼마든지 주님께 나아가서 그 옷을 만질 수 있고 깨끗함을 얻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부정한 자를 깨끗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세계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세계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신자의 부요함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분명 비현실적인 말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삶과 무관한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며 또한 현실입니다.

인간이 죽은 자라는 것 역시 사실이며 현실입니다. 비록 지금은 건강하다고 해도 결국 늙고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죽음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사건입니다. 때문에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아이의 간식비를 보태주는 것이 아니고, 학원비를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죽은 자에게는 자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에는 진리에 대한 관심이 피어 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관여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2. 진리에 관심이 없는 인간이 진리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마태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딸을 죽은 자로 말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이 신앙 문제에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오늘날의 사회나 교회에서 생명의 문제는 어떤 취급을 받는다고 말합니까?

 

6.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현실은 어떻게 다르게 드러납니까?

 

7.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떻게 나타난다고 말씀합니까?

 

8.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혈루증 여인을 통해 말씀하시는 새로운 생명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9.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신자의 부요함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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