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름 받은 사도와 성도
본문 / 고전 1: 1- 3
오늘부터는 고린도전서를 같이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라는 말을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바울의 사도직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서의 서두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나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당시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심각한 공격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색당파, 즉 “내 형제들아~~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전1:11-12)하여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이런 분쟁의 형편 속에서 바울은 사도직의 절대권위에 대해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권면이나 요구의 근거는 상식이나 과학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우리가 믿는바 신앙의 내용과 소원하는 것들은 일반학문이나 상식에 의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보내신 하나님의 존재라는 믿음 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하나님이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권위와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며 또 그 사실을 확인하는 우리의 믿음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위해 보내진 사도라는 권위가 확보되지 않고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기에 편지 서두에 이렇게 그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분명히 인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파로 나뉘어 싸우는 분쟁이 있었고 또 부도덕한 음행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은사와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들의 신앙은 유치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가장 큰 세 가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는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 받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도직이 먼저 확보되어야만 그가 권면하는 말이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모든 판정과 결론의 순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서 변호하는 것을 특별히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2. 사도와 성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사도직에 대해 도전을 받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에 보면 바울에게는 외관상의 약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후10:10) 여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사색당파 중에 아볼로파가 있는데, 아볼로는 바울과 동역한 훌륭한 협조자로서 성경에 대한 지식도 뛰어나고 또 상당한 웅변가였습니다. 말에 힘이 있어서 토론에서 유력한 지원사격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 편에 선 자들은 바울을 공결할 때 특별히 외모를 공격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도직을 변호하는 데 있어 그것은 변명해야 될 실제적인 공격들 중 하나인 것입니다. 외모도 시원치 않고 능력도 의심이 간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하는 것이 자신이 사도직을 옹호하는 근거이고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받은 공격에 대해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긴 것이 사도답지 못하다’라고 공격을 해도 생긴 것을 고쳐서 저들에게 답해야 된다는 생각이 없으며. ‘말을 못 한다’고 해도 말을 잘해서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사도직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목표와 방법으로 밖에는 증거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감당할 직분이라는 것을 깨우친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고전4:6-8). 지금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네가 가진 능력과 은사를 가지고 상대방을 향해 ‘너희는 이것을 못하지’라고 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식으로 하면 ‘방언을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이런 범주에 속합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에 대해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대하여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본을 보였느냐 하면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아볼로가 가르치는 것과 바울이 가르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방향이 달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충돌할 문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싸울 문제도 또 편을 나눌 문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편을 나누는 데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누가 너를 구별 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너희가 지금 소유한 것이 네가 만든 것이라면 잘난 체 한다 해도 되겠지만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네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네 것처럼 덧붙이지 말고 또 네 생각과 다르다고 자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바울의 답이 있습니다. ‘나를 사도로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왜 나를 이 모양으로 불렀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을 너희가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으나 그것은 내 책임도 또 그것을 변명할 방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1:2)이라고 성도를 이야기합니다. 결국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바울과 같은 직분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면 좀 더 부유케 해 주시지 왜 세상 이 조롱하게 이렇게 가난하게 하신 것입니까?’ 하며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과 섭섭한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의 부름이 어떤 것인지를 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깨우치지 위해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자신의 연약하고 실패한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우리가 생각해도 하나님의 사도직은 영광스럽고 멋진 직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스러운 모습과 능력으로 채워서 그 직분을 수행케 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상식일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도 바로 그런 차원에서 바울을 공격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나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도로 부르셨고 그것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고쳐주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를 만물의 찌끼같이 모든 세상의 미말에 두시사 구경거리로 삼았다는 것밖에 나는 증거 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도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자 된 직분을 수행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성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되는 것하고 하나님의 일이 성공하는 것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최고의 실례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죽지 않고 거꾸로 정복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에 십자가의 죽음에서 대속사역은 보이지 않고 죽음으로 끝나는 실패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존재와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바울과 같이 이해하지 못하면 그런 약함이 우리에게 좌절거리가 되고 또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한답시고 주님께 쓰임 받는 일을 거부하는 자리에 서 있기도 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이런 모습이야 말로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과 다른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증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원에 속한 것임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과 존재 속에서 그리고 나에게 맡긴 직분 속에서 증거 하기 위해 우리의 직분을 그런 모습으로 감당하기를 요구하신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영적싸움
고린도후서 10장입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후10:1-8) 바울의 적극적이고 깊은 자기 사도직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으나 육체대로 싸우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다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신과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죄의 최고 핵심이 되는 내용은 하나님 앞에서도 무릎 꿇고 싶지 않은 자존심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하나님과 방불해지기 위해 따 먹었던 것처럼 그런 인간들의 모든 죄의 뿌리와 죄 된 생각의 종착점은 언제나 자기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만 그 직분이 힘을 발합니다. 내가 얼마나 강한가가 등장하는 순간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은 함께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형통하고 승리한 모습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증인들의 승리와 형통은 언제나 그가 혼자 몸부림치고 해결하려고 애쓰며 남의 도움을 무시하던 교만으로부터 어떻게 그런 그가 주 앞에 거꾸러져서야 평안과 해결을 얻었는가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이 높아지고, 주님의 존재가 부각되는 것으로만 우리의 신자 된 모든 직분들이 사용되도록 의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런 이유로 외형적인 모습을 주지 않으셨다고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싸움은 육체에 관한 것이 아니요 영적인 것이니라”이렇게 선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가장 많이 요구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사용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최고의 소원이어야 되고 그 소원에는 돈과 건강과 지식이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부터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존재와 내 삶에서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에 매일 귀를 기울여 자기를 쳐 복종케 해야 합니다. 죽는 법을 구하며, 주께서 존귀함을 받으시기를 매일 구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 때, 필요하신다면 그 밖의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그의 사역을 어떻게 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당연히 못나고 모자라고 당연히 대접받지 못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그로부터 생기는 모든 열매들이 영적인 열매들이 되고 그 모습을 지켜본 제삼자들이 그것은 그의 인간적인 결실이 아니요 또 세상의 학문이나 목표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그를 쓰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철학이나 과학 문학이 아닌 주님께서 나타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학식 있는 바울이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자신이 항복하고 있는 그분이 드러나기를 기뻐하는 존재가 된 것을 드러내는 것 외에는 그의 인생의 소원도 미련도 관심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아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내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인식한 그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함께 함으로 있는 만족과 환희와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충만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들의 최고의 약점이고 이 약점은 근본적인 신앙의 약점이기에 심각한 것입니다. 이 신앙의 문제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사도로서의 자신과 그의 인생 그리고 그것과 방불한 우리의 모습. 하나님은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을 던지시고 주를 아는 일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누시기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를 존귀하게 높이지 않은 한 아무도 우리의 존재와 삶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좇아가는 돈만 좇아가기 바쁩니다. 자존심을 좇아가기 바쁩니다. 교회에서 조차 세상에서의 가진 것과 지위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래서 치사해서 교회를 못가겠다 고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혹 괄시는 할 수 있어도 주님은 괄시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견뎌내야 됩니다. 교회에서는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내용으로 계급이 매겨집니다. 주님 앞에 누가 더 많이 무릎 꿇었으며, 주님이 그 사람을 얼마나 더 쉽게 더 많이 사용하시는가 하는 그것이 바로 신앙 계급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계급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의 깊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 믿음을 우리가 가지기 위해 애쓰셔야 됩니다. 다른 것을 소원하지 마십시오. 다 헛된 것입니다. 이것만이 값진 것이요 영원한 것입니다. 이 영원한 것을 우리 가운데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시며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깊이 이해하셔서 어떤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도 우리의 본분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예원 가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를 확보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사도직의 권위에 도전을 받는 까닭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고린도교회의 사도직에 대한 도전에 대해 바울의 답은 무엇이며, 신자인 우리와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4.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모를 때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도와 성도들의 승리와 형통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6. 우리가 싸워야 하는 주 안에서의 영적인 싸움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