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온전히 합하라
본문 / 고전 1:10-17
오늘 본문부터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본론이 등장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분쟁들 중에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저들에게 있었던 분쟁입니다. 교회 내에서 서로가 적대감을 갖고 있는 분위기였고 바울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싸움의 성격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들의 잘못이 윤리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 차원에서의 잘못임을 지적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로 이런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며 근본적인 치유를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바울의 권면을 통해 우리는 신앙의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1. 세례
먼저 고린도교회의 이런 사색당파가 무엇을 근거로 하여 나뉘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고전1:13) 하는 말씀을 잘 이해하면 고린도교회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를 누가 베풀었는가 하는 것으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냐 게바냐 아볼로냐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의 지적은 “내가 세례를 줄 때 내 이름으로 세례를 주더냐. 예수의 이름으로 주었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 이름으로 너희가 갈라질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너희가 받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았으니 누가 그 세례를 베풀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장입니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오순절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7-38) 여기에서의 회개는 죄 사함을 얻는 회개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과 같은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례를 좀 더 살펴봄으로써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에 말씀하려는 부분의 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6장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 3-5) 세례라는 말 속에는 ‘동일화’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와 합하여, 즉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고 장사되었에 그와 함께 부활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동일화’를 좀 더 쉽게 말하면 ‘연합’이라는 것으로 세례의 중요한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0-21) 이 말씀의 배경은 노아 홍수를 설명합니다. 원래 노아 홍수에서 쏟아진 물은 심판용입니다. 그런데 구원 얻은 8명은 방주를 타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심판용인 물이 아이러니하게도 방주의 그들에게는 오히려 구해 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물이 물에 뜨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심판과 물에 뜨는 방주 안의 사람은 살리는 두 가지 일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과 복음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행하는 것입니다. 방주를 타면 구원을 얻고 안타면 심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노아 방주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지만 안 들어가면 가만히 있어도 홍수가 나서 다 죽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라는 말 속에는 심판받을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을 분리해 낸다는 뜻이 있습니다. 물이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 쏟아진다는 말 속에는 의인들이 죄인들 속에서 고통 하는 것을 분리해서 죄인들을 다 심판해서 없이하고 의인인 하나님의 자녀들만을 모으시겠다는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물은 방주에 타지 않았던 사람들을 죽이는 심판인 동시에 배에 탄자들은 물로 띄워서 그 배가 목적한 곳에 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노아와 그 식구들도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데 방주에 타고 있어서 안 빠져 죽은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 속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기에 살아나게 되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건져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례라는 말 속에는 심판과 구원함의 분리함이 있는데 그 분리 속에서 심판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는 어느 존재 속으로 들어가서 구원을 얻는 방법을 세례라는 포괄적 말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수가 내렸을 때 방주 안에 들어가 있음으로 살아난 것같이 그래서 그 내린 물이 방주 밖에 있는 자에게는 심판이지만 방주 안에 있는 자에게는 물이 구원인 것같이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어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의 대표자로 하나님 앞에서 온 인류의 죄의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형벌,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 사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대표자로 낮아지셔서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망이 그를 묶어 둘 수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때 인류가 사망 가운데 들어갔는데 주를 믿은 우리는 예수님 속에 들어가 있기에 사망이 붙들어 놓을 수 없는 예수님이 부활할 때도 같이 따라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식으로도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2. 속하여, 함께, 그 안에서
그래서 바울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내가 세례를 준 것은 너희에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라는 내용이었지 내 안에 들어오라는 내용이었느냐? 그런데 어떻게 너희가 이렇게 싸울 수 있느냐?”고 하며 저들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함께’라는 이야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이 내용이 ‘속했다’라는 말로 설명되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1-4) 홍해를 건너간 것을 세례 받았다고 하는데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노예가 그 신분을 벗어나는 방법은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노예 신분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지나가는 것으로 애굽에서 벗어났습니다. 즉 역사적으로는 홍해가 갈라져서 지나왔지만 상징적으로는 홍해에 다 빠져 죽은 것이란 말씀입니다. 상징적으로는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다 홍해로 들어가서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노예로서 소유권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는 것이 끝이라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벗어나고도 살아야만 나온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모세에게 속하여 건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낼 때 홍해 건너편 광야에 속한 사람입니다. 지나올 때 죽고 끝나는 사람이 아니라 건너편에 살아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속해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가고는 싶지만 애굽을 나오려면 바다에 빠져 죽기 때문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유인입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 쪽으로 보면 애굽에 있었을 때의 저들의 노예 신분은 홍해에 빠져 죽는 것으로 끝나고, 그들이 모세에게 속해 있기에 원래 광야에 있었던 모세는 홍해에 빠져 죽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에 모세가 살아 있는 것같이 그 백성이 저에게 속해 있으면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성경이 자꾸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함께 산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2장입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 ‘그 안에서 그에게 속하여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으므로 그가 부활할 때 우리도 함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식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속하는 것, 이것이 세례를 받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세례식은 ‘나는 이제 주님께 속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계신 곳에 나도 함께 있게 해 주시고 나 혼자 있으면 당하게 되는 영벌로부터 구해 주십시오’라는 신앙 고백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함께’ ‘그 안에서’ ‘그에게 속하여’ 이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분파와 싸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배웠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그의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지 바울을 배운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분파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일을 하는 데 견해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견해차이라는 것은 방법론의 차이여야지 근본적인 차이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 신자들의 신앙 원리이고, 기초인 것입니다. 싸움이 일어나서 혹 우리가 누구와 갈라선다면 그것은 상대방과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갈라서는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하나됨
에베소서 4장입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으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1-6) 우리는 원래 하나입니다. 몸이 하나이고 성령이 하나이고 부르심의 소망도 하나이고 주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한분이십니다. 그렇다고 모든 의견이 만장일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목적지를 가면서도 어떤 사람은 전철로, 어떤 사람은 버스로 또 어떤 사람은 택시로 가자고 하는 방법론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것에 관한 싸움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싸움이 근본적인 것에 대한 싸움으로 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과 서로 용납이 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싸움으로 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자 이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싸움이 생길 것 같으면 우리는 중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 때문에 근본적인 것이 갈라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갈라질 것 같으면 차라리 그 일을 포기하는 것이 참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바로 그 시각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꾸짖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간에 증오와 경쟁심 때문에 결국은 너희의 신앙을 집어던지는 데까지 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시험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탈출하게끔 만듭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공격하고 난처하게 만들며 상대방을 절망케 하기 위해서라면 나도 망가져도 좋다는 생각에 스스로 빠져들고 마는 것, 그것이 시험의 아주 핵심입니다. 여기에 빠지지 마시고 성경이 요구하는 누구든지 복된 자리에 함께 가도록 하는 일로만 우리의 생각과 능력과 인생을 쓰십시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꾸짖은 내용이요 오늘날 우리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골로새서 2장으로 가 보십시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8-19)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 교회로 부르심을 받고 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몸의 다른 지체들입니다. 팔과 다리가 다르게 생겼고 다른 데 붙어 있지만 다 한 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머리하고 연결이 되어 있고 연합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유기체입니다. 그러니 일부러 겸손함 혹은 천사 숭배 혹은 어떤 신비로운 체험으로 인해 머리를 붙들지 않고 자기 안의 독립된 근거와 혼자만의 만족한 자기 영역을 개척하려는 마음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홀로 독립하게 되는 것, 이것이 시험의 핵심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자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배울 선생이 있고, 내가 공경할 부모가 있는 것 같은 그런 개념입니다. 부모가 있다는 것은 그가 행복하다는 것이지 그가 부모 없는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될 것은 하나 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물론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토론하고 논쟁을 벌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증오심과 자기를 부각시키는 교만으로 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면 결국은 하나 됨으로부터 이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는 파멸로 이끌고 가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슨 일이든지 양보하시고 무슨 일에서든지 온유하시고 겸손하십시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유혹과 시험에 대해 바르게 아셔서 이기시고 우리 자신이 구원 얻고 그 구원에 든든히 설 뿐 아니라 그런 시험에 빠진 이웃들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온유와 겸손을 통해 저들이 원래 확보하고 있었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약속과 복된 은혜들을 놓치지 않게 하는 우리의 직분을 감당하실 줄 아셔야 됩니다. 그것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을 보며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되고 분명히 해야 할 우리 신앙의 깊고 근본적이고 분명히 알아 두어야 될 원리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바른 앎을 통한 하나님의 이루시고자 하는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고린도 교회가 세례로 인해 분쟁이 생긴 원인과 바울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2. 성경에서 말씀하는 세례라는 말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애굽 땅 종 되었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면 교회에 분파와 분쟁이 생길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시험의 핵심은 무엇이며, 신자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