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하여 너희의 마음을 넓히라
본문 / 고후 6:11-13
1. 달콤한 유혹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사도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자신의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어졌다고 합니다. 여기 입이 열렸다는 말의 의미는 숨김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어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그 마음을 모르고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복음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낳았기에 부모와 같은 위치에서 자녀들에게 이르듯이 권면하니 고린도교회는 ‘자녀가 부모에게 보답하듯이 마음을 넓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고린도교회는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것입니까? 예를 들어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중에서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 하는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나무라는 적이 없이 그저 좋게만 대하여 주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잘못하면 잔소리도 하고 매도 듭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잔소리를 하거나 매를 드는 이유는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야 한다는 사랑으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마음은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더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고린도교회도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고 떠난 후에 다른 선생들이 들어 왔는데 그들이 와서 전하는 내용과 바울이 전하는 내용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인데 반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되어야 한다는 외모를 중심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외모를 자랑하며 육체대로 말하는 자들을 대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고린도교회나 오늘날 우리는 누가 더 좋아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설교시간마다 인간의 죄를 이야기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 증거 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이제는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옛 본성상 후자의 이야기가 훨씬 더 달콤할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전하면 처음 들을 때는 좋을 수도 있지만 매주 들으면 슬슬 짜증도 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러면 예수 믿고서 가난해야 정상인 것이냐’ 하는 불만의 목소리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고서 나의 삶이 만사형통하게 잘 풀리면 그것이 예수 믿는 증거가 분명한 것이며 반대로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어려움은 다 당하고 때로는 믿지 아니할 때보다 어려움과 고난이 더 있는 것은 예수님을 바르게 믿지 않는 증거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겁니다. 한때 유행하였고 지금도 좋아하는 삼박자 축복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되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간단하게 줄이면 영통하면 인통하고, 인통하면 물통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통하면 인간들은 다 통하게 되어 있고 그러면 물질도 다 통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성을 바치든 기도를 하든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과만 통하면 만사형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통하는 방법을 일반인들을 잘 모르기에 전문가인 목회자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목회자들이 반말을 하고 때로는 욕설까지 섞어가며 떠들어 대도 이렇게 말하는 자들의 말을 떨쳐버리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그들이 말하는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증거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그리스도의 사도요 셋째 하늘까지 갔다 온 바울사도는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의 모습은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이 환영할 만하고, 영접할 만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부담이 되고, 어떻게 하든지 멀리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일꾼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일꾼이고,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능력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의 유혹은 예수님에게서만이 아니라 바울사도에게도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보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다 주겠다고 유혹한 마귀의 유혹이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경제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기적 그리고 세상의 영광에 대한 유혹으로 다가 오는 것입니다. 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진정한 부요함
이렇게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 좋은데 성경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고 말씀하니 성경을 멀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아하는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설교 하는 사람과도 멀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외모를 자랑하고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을 가까이하고 또 기꺼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영접하는지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11:19-20) 라고 까지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영접한 자들은 외모를 자랑하고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고, 뺨을 치는 정도로 고린도 성도들을 대하고 있음에도 고린도 교인들은 그런 그들을 용납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하는 것을 듣지 않으면 자신들이 저주를 받을까 두려운 것이며 또 그들의 말을 잘 들어서 자신들이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는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어느 성도가 자기 교인인지 아닌지를 점검하기 위하여 인감증명서를 떼 오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그 요구를 받은 성도가 ‘왜요?’ 라고 반문하면 자기 교인이 아니고, 군말 없이 순종하는 성도는 자기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축복한다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그렇게 하면 목회자가 좋아하고 축복해 준다니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성도가 교회에서 몇 명이나 되는지 점검하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말을 하니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 방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른 가르침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목회자라 할지라도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것이 좋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 말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고 오직 복을 받기 위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복보다는 땅의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보다는 이 땅에서의 성공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와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을 좇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들을 자신들도 가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울사도가 그런 자랑이라면 나도 너희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하면서 나도 어리석게 나의 육체를 자랑하겠다고 하며 자신의 출생과 자신의 사역을 말합니다. 그 어떤 누구도 바울사도만큼 엄청난 희생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사도를 멀리하고 다른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사도가 그런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기고 자신의 약함만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꾸만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지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그렇고 하늘의 소망만을 말씀하는 목회자라면 이런 질문 한 번쯤은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고 부자가 되면 안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부자가 되라 또는 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받는 자 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란 무언가 소유가 많은 것을 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소유가 많은 것을 부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의 부자와 하나님의 시각의 부자는 다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8-9) 서머나 도시 자체는 부요한 도시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로마의 황제 숭배를 거절함으로 경제적 제재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대 감정을 가진 유대인들로부터도 온갖 핍박을 당하여 실제적으로 궁핍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부요하다고 인정하십니다. 이것은 육신적으로는 궁핍하나 내적으로 정결하고 부요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하나님의 시각으로서의 부요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으로는 부요하나 내적으로나 영적으로 궁핍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와는 정반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가 부요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들은 상당히 부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서머나 교회와 대조를 이룹니다. 라오디게아는 금융업이 발달하고,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섬길 수 없는 상태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 부요하다고 착각하여 전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뭐라도 주려고 하면 내가 있어야 줄 수 있으니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부자가 되어서 많이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좁아지는 것입니다. 소유란 것이 이상해서 어느 정도 소유하게 되면 점점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답변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마음을 넓히라
그 답변을 듣기 위해 누가복음 12장을 보겠습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3-21) 생명이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를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 우리 영혼을 하나님이 도로 찾으시면 그것이 누구 것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성경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오늘을 그렇게 살아야 함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말세에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복음을 듣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복음만으로 사는 게 참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마침 추천서를 가진 자들이 와서 바울사도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이요,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세상을 꼼짝 못하게 하는 힘과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사도에 대하여 불의를 행하고, 해롭게 하고 속여 빼앗는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후7:2)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 말을 해야 할 정도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이 복음에 대하여 좁아질 대로 좁아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복음에 대하여 어떠합니까? 마음이 넓은가 아니면 좁은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기 전과 후를 보면 언제 더 마음이 넓은 것 같습니까? 복음을 정말로 사모하십니까 아니면 귀를 막고 싶은 심정입니까? 복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사모하는 복음의 사람은 분명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요한 자로 살아갈 수 있음을 약속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도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떤 방향으로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바울사도의 근심은 항상 교회를 위한 근심과 염려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근심이었습니다. 이런 근심은 세상의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기에 후회할 것이 없이 회개에 이르게 하여 궁극적으로 기쁜 것이 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아무것도 없이 돌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자들에게 부요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바울사도도 가난 하였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였습니다. 주님 오실 때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복음으로 부요하게 한 것입니다. 이 복음으로 부요하게 하는 일에 우리 마음이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세상에서 볼 때에 아무것도 없는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여도 예수의 생명이 없으면 그는 아무것도 가진 자가 아닌 것입니다. 천하를 얻어도 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라면 예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넉넉함이 우리에게 넘쳐 하나님의 복음에 우리 마음이 더욱 활짝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부요한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사 이 땅의 것을 많이 맡은 자가 되었어도 주님 보시기에 부요한 자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닌 보이지 아니하는 것으로 사는 믿음과 복음의 사람임을 우리가 사는 모든 삶에서 선포함으로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매일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 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우리 안에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한 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표현됩니까?
3.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생들을 쉽게 용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부요함에 대한 세상의 시각과 성경의 시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5. 성도란 종말론적인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6.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근심은 무엇입니까?
7.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우리 마음이 넓어져야 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