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9,801
오늘 : 67
어제 : 286

페이지뷰

전체 : 78,732,889
오늘 : 149
어제 : 1,883
조회 수 15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믿음으로 요셉은

본문 / 11:22

 

1. 종교성

인간은 성경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도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반해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라고 주장하고 고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보고 또 이러한 해석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장치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자신의 뜻과 계획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바른 뜻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실력이나 의지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고 합니다.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은혜를 원하는 자라면 그는 분명 영생을 소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영생을 소망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의 것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를 말하되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에서의 영화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말하면서도 성경과는 정반대의 것을 보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 없는 나를 붙들어 영생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잘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봐도 믿음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만사형통으로 인도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가르침은 다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지 못한 무지한 자들의 어리석은 소리일 뿐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위엣 것을 구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헛된 바람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회사 문을 닫기도 하고, 암에 걸려 죽기도 하고 또 원치 않는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평소 열심히 믿음 생활하고, 열심히 기도했다고 해서 소위 세상에서 불행이라고 여기는 사건들이 결코 그를 피해 지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나를 지키고 보호하실 것이고 그러므로 여러 재난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을 수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자신의 수호신이나 경호원쯤으로 여기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로 믿음과는 상관없는 헛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를 구별하여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고 인도하시지만,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뜻 안에서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중심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우리의 삶의 풍요와 안락을 위해 만사형통으로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믿음과 만사형통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는 것은, 목사 본인이 그러한 것을 기대하기도 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교회를 찾는 자들이 그런 설교를 좋아하고, 그런 설교를 은혜롭다고 요구하는 잘못됨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에 와서 목사로부터 그런 설교를 들음으로 믿음을 만사형통, 즉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의 성취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찾을 때부터 교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이 세상에서의 만사형통을 기대하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에서의 만사형통은 기독교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종교와 인종과 문화와 국가와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는 내용으로는 동일한 것이고, 그 탐욕을 자신이 믿는 신의 힘을 빌려 채우려고 하는 종교성 역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종교를 이용하거나 신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2. 요셉의 시각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은 성경에서 성경이 증거 하고자 하는 뜻과 가장 다르게 해석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하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요셉의 꿈과 고난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며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총리가 되어서 가족을 살리고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요셉의 이야기가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서 잘 먹고 잘살았더라는 것으로 결론이 나와 버린다면 그것은 정말 사람들이 환영할만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없기에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동기를 주는 것이 요셉의 이러한 이야기에 많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꿈을 가지는 것,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할 것 그러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를 말하며 반드시 성공이 주어질 것이라고 격려하고 응원하는 패턴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적절한 간증을 도입하면 경제문제도, 취업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교회의 문제도 심지어는 나라의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대단한 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도 아니고 또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만사형통한 사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우리는 요셉의 결국, 즉 요셉이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된 것을 하나님이 그를 형통한 사람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요셉이 애굽으로 팔리고,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등의 고난도 있었지만 그것은 다 형통을 주시기 위해 요셉을 단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05편에 보면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05:17-19)라고 합니다. 형들의 시기와 노여움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요셉의 일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앞서 보내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셉의 옥살이들도 결국은 여호와의 계획과 뜻, 즉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요셉을 단련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까지도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비록 요셉과 같이 고난과 어려움에 있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더욱 힘써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봉사하고 더욱 힘써 하나님께 바치면 결국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이 형통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을 오직 자신의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자신은 자기 인생을 어떻게 이해했겠습니까? 요셉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의 총리라는 성공을 주시기 위해 잠시 잠깐 자신을 환난에 있게 하셨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5장에 보면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45:7-8)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요셉은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을 자신의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큰 구원으로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그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하나님에 의해서 형들을 위해 사용된 하나님의 도구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단순히 기근에서 구출하기 위해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근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요셉을 애굽에 보내 기근을 준비할 필요가 없이 아예 처음부터 기근이 없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요셉의 형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게 하고 그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을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죽었다고 거짓으로 고하는 그 모든 일의 과정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아픔을 외면한 자신들의 잘못됨을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아픔을 아는 이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이것이 생명인 것입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았기에 애굽에 팔리고 결국 국무총리가 된 모든 것이 형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세상의 영화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남겨 두신 이유를 생각하며 날마다 삶의 이유를 하나님께 두면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3. 요셉의 유언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11:22)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50장의 있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50장에 보면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50:24-25)고 합니다. 여기 말씀하는 것처럼 요셉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될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들어갈 것을 유언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언은 자기 아버지 야곱의 유언과 같습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49:29-33)고 합니다.

아버지 야곱도 또 아들 요셉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땅에 묻히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언은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생각하고 자신의 고향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내용과는 다른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본향은 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실 터를 바라본 것입니다. 이 땅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는 것을 알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 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모형이고, 실체는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공통점인 것입니다. 여기에 야곱도 요셉도 합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어 해골이 되었는데 해골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또 어디에 묻혀 있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이러한 해골에 대한 유언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런 유언을 할 때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은 결국 자기가 늙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몸이 따라가지 않으니 할 수 없이 늙어 가는가 보다고 간접적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실상은 매일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음을 부정하고 계속하여 산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으니 정작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요셉의 해골에 대한 내용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성공시대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점점 해골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해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요셉의 이 유언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멀쩡히 살아있고, 욕망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서 마른 뼈와 해골이라고 누가 인정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신이 해골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7:1-14)고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의 영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을 때 이들은 이스라엘 마른 뼈다귀들이었습니다. 해골더미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움직여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뼈들이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것입니다. 또 말씀을 대언하니 생기가 들어오게 됩니다. 이 마른 뼈들이 이스라엘이며 스스로 돌아올 수가 없는 상태에서 이들을 말씀으로 살리시고 돌아오게 하시는 일을 통하여 그렇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이런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죽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에 등장하는 마른 뼈와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답다고 멋있다고 자기를 가꾸며 사는 일들이 해골이 굴러다니는 일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실상인 해골임을 알지 못하고 껍데기만 포장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껍데기를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약 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아들의 생명이 없는 자는 껍데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자랑할만한 것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껍데기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껍데기란 애굽의 영광이며, 세상의 영광입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껍데기란 교회라는 외적인 모습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제는 해골로 보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해골을 위하여 유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해골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떠날 것과 약속의 땅에 묻을 것을 유언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요셉에게 임한 은혜가 동일하게 임하였다면 이 세상에서 떠날 것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최고의 소원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보여준 유언의 내용이며. 이것을 히브리서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이 유언을 하고 죽고 나서 수백 년이 지납니다. 요셉을 아는 왕들과 그 시대의 사람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만은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성취가 일어나서 그들의 고역과 부르짖음을 통하여 언약의 하나님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자 모세를 보내셔서 출애굽 시키시는데 요셉의 유언을 잊지 않고 그대로 시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13:18-19)고 합니다.

요셉이 단단히 맹세시킨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를 돌보실 것인데 그 때에 나의 해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챙겨서 나오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서 약속의 땅에 묻히는 것,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가는 것이 요셉의 믿음이며 소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고자 합니까? 우리의 자녀들에게 단단히 맹세시킬 일이 무엇입니까? 과연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죽는 것이 복임을 알고 이것을 최대, 최고의 유언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마른 뼈로 무덤에 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살려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신 이 일에 놀라지 아니하는 우리의 무디고 무딘 심정을 회개하며, 우리의 해골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묻히기를 소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4, 가나안 땅

그래서 약속의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생명의 땅입니다. 땅 자체가 생명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약속의 땅으로 그 땅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국무총리이든 뭐든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에게 국무총리라는 세상적 지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워진 역할이었을 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생명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므로 세상의 영화 따위는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지위에 있든 그 모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자리며,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받아 사용되는 일꾼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지위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그것을 힘으로 이용하여 타인을 다스리려고 하지 않게 되고, 더군다나 그것을 복을 받은 것으로도 열심히 믿어서 만사형통한 것으로도 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의 그 무엇을 얼마나 누리며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죽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요셉으로 하여금 약속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해골이라도 애굽을 떠나 약속 안에 거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세상의 영화를 제공하고 만사형통을 준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탐욕에 치우쳐 영생을 향한 소망은 희미한 채 다만 믿음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동일한 죽음에도 분명한 하나의 구별이 있는데 그것은 약속 안의 죽음과 약속 밖의 죽음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든 죽음에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약속 안의 죽음이냐 아니면 약속의 밖의 죽음이냐가 중요한 문제일 뿐입니다. 한쪽은 생명이며 한쪽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약속 안에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면, 세상의 영화는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오직 하늘의 생명을 소망하면서 힘든 삶이든 아니면 조금 편한 삶이든 상관없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인가에만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나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생명 되신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흉내를 내는 거짓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세계를 사는 신자는 예수 안에서 살다가 예수 안에서 죽는 것을 소망할 뿐이지 세상의 영화나 만사형통과 복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해골을 약속의 땅으로 메어가게 함으로써 약속 안에서의 죽음이 되고 싶어 했던 이것이 요셉을 이끌었던 참된 믿음임을 기억하시고 오늘 우리를 붙들고 이끌어 가는 것이 요셉을 이끌었던 믿음과 동일한 것인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자의 영생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약속한 바가 없습니다. 진리를 실천하여 살면 그 실천이 선이 되고, 우리의 죄를 덮고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곳도 있지만, 그 모두는 하나님의 약속을 벗어난 인간의 거짓된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은 그 은혜와 십자가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지닌 약속을 의지하고 피를 증거 하는 것이 약속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2 2022 4월 3일 / 히브리서 70. (히 12:14)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관리자 2022.04.03 212
591 2022 3월 27일 / 히브리서 69. (히 12:9-13) 하나님의 징계의 유익 관리자 2022.03.27 236
590 2022 3월 13일 / 히브리서 68. (히 12:4-8)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심 관리자 2022.03.13 238
589 2022 3월 6일 / 히브리서 67, (히 12:3)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관리자 2022.03.06 174
588 2022 2월 27일 / 히브리서 66. (히 12:12-2) 온전케 하시는 이 관리자 2022.02.27 180
587 2022 2월 20일 / 히브리서 65. (히 12:1-2) 예수를 바라보자 관리자 2022.02.20 229
586 2022 2월 13일 / 히브리서 64. (히 11:39-40) 더 좋은 것 관리자 2022.02.13 222
585 2022 2월 6일 / 히브리서 63.(히11:35-38) 믿음과 고난 관리자 2022.02.06 183
584 2022 1월 30일 / 히브리서 62. (히 11:32-34) 그들은 믿음으로 관리자 2022.01.30 170
583 2022 1월 23일 / 히브리서 61. (히 11:31) 믿음으로 라합은 관리자 2022.01.23 191
582 2022 1월 16일 / 히브리서 60. (히 11:30) 믿음과 여리고 관리자 2022.01.16 162
581 2022 1월 9일 / 히브리서 59. (히 11:29) 믿음으로 홍해를 관리자 2022.01.09 181
580 2022 2022년 1월 2일 / 신년감사예배 / (마:15-12-14) 함께 세워져 가느니라 관리자 2022.01.02 210
579 12월 26일 / 성탄예배 / (눅 1:26-38) 은혜를 받은 자여 관리자 2021.12.26 150
578 12월 19일 / 히브리서 58.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 예식을 정함 관리자 2021.12.19 103
577 12월 12일 / 히브리서 57.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관리자 2021.12.12 128
576 12월 5일 / 히브리서 56.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관리자 2021.12.05 115
575 11월 28일 / 히브리서 55. (히 11:23)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관리자 2021.11.28 160
574 11월 21일 / 추수감사 / (신16:16) 이스라엘의 3대절기 관리자 2021.11.21 330
» 11월 14일 / 히브리서 54.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관리자 2021.11.14 151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