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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음과 여리고

본문 / 11:30

 

1. 인간의 한계

천국은 어떤 사람이 가느냐는 것은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여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맞는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정확한 것은 성경에 천국 간 사람과 멸망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천국을 갔고 또 무엇 때문에 멸망을 받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천국 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그 사람을 천국 보내신 기준으로 우리를 대하실 것이고 또 심판받고 멸망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그 사람을 기준으로 우리를 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천국을 보내시는 기준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천국 보내시는 하나님의 기준을 알았다고 해도 내 스스로 그 기준에 나를 맞춰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천국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도무지 우리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외면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떻게 천국을 보내시는지 그 방식과 그 기준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천국 보내시는 방식과 기준을 왜 세상이 믿지를 않는 것입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이스라엘과 기적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11:30)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여리고 성이 무너진 기적의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홍해가 갈라진 것만큼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기적을 많이 원합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원하는 것은,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나면 나의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적에 대한 오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적으로 인하여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삶의 질이 달라졌습니까? 놀랍게도 홍해를 건넌 그들을 기다린 것은 광야였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기적이 이스라엘을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 곧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삶의 질의 문제로 인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10:1-2)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홍해를 건넌 사건을 바울 사도는 세례, 즉 예수를 믿는 것을 예표하는 것으로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천국으로 상징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닌 광야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처음 믿는 자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천국 생활처럼 좀 더 나아진 삶을 기대하지만 실상은 원하지 않는 광야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그 원하지 않는 환경을 바라보며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 생활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되는 것입니까? 신명기 8장에 보면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2-3)고 합니다.

한마디로 무엇입니까? 네 마음이 어떠한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실체가 드러나고 또 인간이 원하는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존재임을 보게 하고,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광야생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홍해를 건너는 기적은 우리의 기대처럼 우리의 삶의 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누구이고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또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기적을 기적으로 보지 않고 또 보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함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한 것은 단지 신비한 기적을 경험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하나님을 만난 자들을 보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배가 잠길 정도로 고기를 잡은 일로 인해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8)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함께할 수 없는 거룩한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구약 성경 이사야서에도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한 이사야 선지자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부인하며 낮추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실체와 죄를 보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증상인 것입니다.

러면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베드로나 이사야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부르실 때처럼 예수님이 성육신 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이사야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가 우리 가운데 그렇게 임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나님의 말씀은 히브리서 4장에 보면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 앞에 드러나는 우리의 결과는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없는 불의한 자기 존재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자는 오직 주만 바라보고, 주만 의지하게 됩니다. 결국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나에게 떡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며 또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만을 위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되어서 자신을 부인하고 살아가며 또 주만을 바라보는 자로 살게 되는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여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전혀 전투를 하지 않고 그냥 성을 돌았을 뿐인데, 그 커다란 성이 무너졌기에 기적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무너짐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믿음이 이러한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까? 이것을 오해하여 어떤 사람들은 저것이 내 것이 된다는 믿음이 있으면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그곳을 돌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리고를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곳을 내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가지고 지금도 그런 일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가 무너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여리고가 무너진 이유, 즉 여리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리고가 무너진 이유가 결국은 누가 멸망을 받는가에 대한 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무너뜨리신 그 기준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여리고가 무너진 것은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 6장에 보면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6:8-9)고 말합니다.

스라엘이 여리고를 돌 때 그냥 아무렇게나 돈 것이 아니라, 제사장 일곱이 나팔을 불며 앞에서 진행하고 언약궤가 그 뒤를 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거룩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이 앞에 서서 나팔을 불며 진행을 합니다.

나팔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에서 나팔소리가 들린다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나팔을 부는 그 뒤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인간의 죄로 인해 정결한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현장입니다.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언약궤의 피를 믿지 아니하면 그들 역시 멸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심판과 구원의 중심에 바로 희생 제물의 피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피를 믿는 자는 살고, 피를 믿지 않으면 멸망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포의 내용입니다.

결국 여리고가 무너진 것은 희생 제물의 피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리고가 희생 제물의 피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희생 제물의 피로써 그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존재로 여김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며 그 결과로 용서 받지 못하는 멸망의 자식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사느냐 하는 것은 보지 않으십니다. 누가 희생의 피를 믿느냐만 보시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다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런 내용은 신자로서 기본적으로 다 알아야 하는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시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를 믿어야 천국 간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피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예수님의 피를 안다라는 생각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나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가?’를 물어야만 합니다. 홍해 사건에서 애굽의 군대가 죽어야 했던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과는 달리 어린양의 피를 믿지 않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렇게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여리고도 우리 생각처럼 악한 짓을 많이 해서 하나님이 멸망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어린양의 피와 상관이 없는 존재라는 것 때문에 심판받고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세상이 과연 이해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는 거룩한 존재입니다. 죄가 없어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악을 덮고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살아남을 자는 나의 모든 악이 예수님의 피로써 용서되었음을 믿는 거룩한 신자들뿐입니다. 그 외는 모두 부정한 자로 취급되어 멸망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거룩한 제물이 흘린 피로써 내가 깨끗함을 입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믿지 않는 세상은 망하게 되어있음을 믿는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4. 복된 신자

신자는 여리고를 돌고 있는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즉 세상을 돌고 있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바라보며 돌았던 것처럼, 신자 역시 거룩하지 못한 세상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며 돌고 있는 것이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세상에 있는 것으로 부러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세상을 돌고 있는 것이 신자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거룩한 것만 남기고 더러운 것은 모두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이야말로 우리에게는 반석이 되고, 산성이 되고,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악한 존재인 내가 거룩하다 여김받고 영생에 이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믿는 믿음이 내게 있다는 것 바로 이 모든 것은 기적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기적에 대해 잠잠할 뿐입니다. 그리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거룩한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돈이 보이고 자기 자신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에 대해 세상은 잠잠하나 신자에게만은 하루하루의 힘이 되어야 하고, 위로가 되고, 복된 소식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며 복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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