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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온전케 하시는 이

본문 / 12: 1- 2

 

1. 무지함

집 밖에서 놀다가 오물을 잔뜩 묻혀 가지고 집에 들어온 아이가 어머니가 집 안 일을 하는 걸 보고 그 어머니를 돕는답시고 집 안 청소를 하겠다고 달려든다면 그것이 과연 어머니를 돕는 것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 어머니를 도와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잘못됨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에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고 합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6-28)고 합니다. 여기서도 보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를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또는 종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에수 안에서 하나인 것입니다. 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깨끗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더러운 존재인데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 깨끗하다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누리게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오물이 잔뜩 묻은 더러운 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를 한다는 것이 하나님께 전혀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우리를 깨끗이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우리들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가복음 7장에 보면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18-22)고 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과연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서는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깨끗하다면 우리의 속에서 나오는 것 또한 깨끗한 것이 나와야지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깨끗한 것이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말하는 우리에게서도 나오는 것은 여전히 더러운 것뿐입니다. 여전히 미움과 시기와 질투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올 뿐인 것입니다.

러면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서 그런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여전히 쏟아져 나오는 것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약해서 그런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좀 더 자라면 믿는 우리는 깨끗해져서 우리에게서 그런 것들이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 역시 아닙니다.

냐하면 믿음은 우리를 깨끗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효능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오물 묻는 더러운 자임을 알게 하고 깨끗하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러운 나를 위해 깨끗하신 그리스도가 오셨음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들리는 것은, 믿는 자는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 속에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열심히 구제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보는 것을 신자에게 있어야 할 당연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심이 없을 때에는 게으른 믿음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느 곳에서도 믿음을 그러한 종교적 열심으로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교회가 세워졌지만 바울은 어느 교회에서도 우리가 앞에서 말한 행위의 열심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믿을 것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외치실 때 유대인들 가운데는 열심 당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신 예수님이 그들의 열심을 칭찬하셨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때 그들의 열심과 지금 교회가 말하는 열심이 어떻게 또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반대로 예수님께 믿음이 있는 자로 칭찬받았던 성경의 인물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혈루병을 앓은 여인, 소경 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위한 열심으로 믿음이 있는 자로 칭찬을 받은 것입니까? 물론 그들에게도 열심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예수님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있었고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자신에게 있는 것들이 고쳐지지 않음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예수님만이 자신을 온전케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열심이 그들의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강조하는 열심과는 다른 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고침 받기를 원했던 이들은 자신이 온전치 못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전치 못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소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것,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 예수님을 찾았던 소경과 문둥병자 그리고 죄인들과 오늘날 우리가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면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고침 받는 복음서의 내용은 단지 육신이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기도하면 낫는다라는 미신적 요소로만 받아들여질 것이 뻔합니다.

또 그렇게 성경을 이용하는 무리들이 설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점검해야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주의 일인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주의 은혜가 우리 예배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2. 실체를 앎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라고 말합니다. 비록 성경이 우리에게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이 말에 순종할 사람은 예수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뿐일 것입니다.

여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믿음의 창시자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을 주신 분이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만약에 믿음의 기원이 나에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열심과 자기의 의로움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열심으로 잘 행하며 달려왔는지 자기의 행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바라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믿음의 창시자는 내가 아닌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아는 자만이 오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믿음의 시작도 예수님이요, 믿음의 온전함도 예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바라본다고 하면서도 성경이 말씀하는 의도와는 다르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예수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또는 자신의 병을 고침받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오직 자신의 일을 도와주거나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바라보며 삽니다.

자신을 위한 예수, 자기가 만든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산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만날 수 있는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도 아니고,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도 아닙니다.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 오셨는데 정작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우리는 내가 온전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아니라, 교회가 잘되고 내 사업이 잘되고 병이 낫기만을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예수를 찾는다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 먼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내가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병든 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즉 내가 소경이고 문둥병자임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니면 나는 저주에 붙들린 불쌍한 존재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당시의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심으로 나왔던 그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절박한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교인들에게는 이것이 상실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문제는 소경과 문둥병자와 같은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소경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할 뿐, 죄 가운데 있는 자기 실상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의 신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위에 파묻혀서 자기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받았음을 말하면서도 지금의 우리 자신은 그런 바리새인과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무장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반대하고 십자가에 죽인 자가 자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다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다움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을 꿈꿀 뿐입니다. 인격적으로 고상해지고 종교적으로도 뛰어난 활동으로 자신을 가꾸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볼 이유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위한 일 즉, 선한 일을 도와주고 힘을 주는 예수를 원할 뿐인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온전하게 해 주시기만을 기다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인인 것은 맞고, 온전치 못한 사람인 것도 맞지만 그것은 모두 지나간 옛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고 또 구원을 받았으니 온전하게 된 사람답게 살아야 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온전하게 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고 또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열심 있는 종교적 활동과 교회 일에 국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온전하게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나를 온전케 하실 수 있음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온전하게 하심을 증거하고 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즉 온전하게 된 사람답게 사는 것은 나를 온전하게 하신 예수님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 역시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만을 높이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최고의 일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바라봄

예수님은 전시장에 걸려 있는 전시품이 아닙니다. 전시장에 들러서 잠깐 구경하고 돌아가면 되는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는 영생이고 구원이고 선물이기에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항상 나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마음이기에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사도 바울의 말에 대해서도 무관심해 버립니다. 이러한 우리가 나의 문제성과 심각성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언제나 벽에 걸린 전시품일 뿐입니다.

믿음은 종교적 활동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의 불쌍한 처지에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기에 주를 바라보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로 살기를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발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해달라고 통곡하는 그 심정으로 주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는 온전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또 예수를 바라보고 사는 것에도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찾는 것이 취미생활의 일환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전부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그렇지 못합니다.

성경은 천국을 말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세상만 들어옵니다. 천국이 소망이 아니라 세상에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소망을 위해 예수를 찾으면서도 그것이 멸망으로 향하는 길임을 생각지를 못합니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그냥 밀쳐 내 버릴 뿐입니다. 자기만의 예수를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러한 우리의 완악함이 말씀에 의해 고침을 받고 그렇게 온전치 못한 나를 온전케 하신 분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자 되기를 소원하며 예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자다운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자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온전할 수는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온전한 분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여김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온전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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