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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심

본문 / 12: 4- 8

 

1. 인간의 욕망

인간에게는 자기 구원을 향한 욕망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3:7)고 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따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아담이 자신들의 수치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막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것은 사단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껏 전달되어 내려오고 있는 인간의 죄성이기도 합니다. 범죄한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자기 스스로 그 수치를 가려 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고 합니다. 인간의 수치는 인간의 그 어떤 힘과 노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치는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죽은 그 무엇의 가죽으로만 가려지는 것입니다.

찬가지로 인간의 죄는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과 열심으로 가려지고 사하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는 오직 죄인 된 인간을 위해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과 은혜로만 가려지는 것입니다.

러나 아담으로부터 전달되어 내려오고 있는 인간의 죄성은 여전히 구원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려고만 합니다. 그런 인간이기에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을 선으로 여기게 되고, 보탬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구원과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과 다른 관심을 가지고 인간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아들에게만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아들의 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2. 징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 아들의 피는 인간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의 죄로 인하여 흘리신 것이고 그리고 그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멸망 받아야 할 자들을 용서하신 것이기에 오직 그 아들에게만 관심이 있으신 하나님은 과연 누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그 피의 은혜를 알며 감사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런데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관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 구원을 향한 욕망과 집착으로 무장한 채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이기에 아들을 보내신 것도 나의 구원을 위해, 지금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도 나의 구원과 복을 위해서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에스겔서 36장에 보면 “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20.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6:16-28)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시는데 그 이유가 22절의 말씀처럼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하시면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자기 구원과 그리고 자기가 받을 복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자기 관심사에만 관심하며 살아가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일 뿐입니다. 나의 죄로 인해 피 흘리신 아들에게 관심이 있고 또 고마움이 있다면 아들을 그렇게 피 흘리게 한 나의 죄에 대한 미움이 분명히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우리의 입술로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은 거짓이며 위선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만 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죄를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혹 죄를 좋아하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이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기에 모든 관심이 자기 육신을 향해서만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렇게 내 자신이 오직 내 육신이 잘되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내가 십자가를 말하고,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실 것이라는 착각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은혜를 말하고 천국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오직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이러한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하나님 나리로 돌려놓기 위해 우리의 육신을 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징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징계는 죄지었기에 벌주는 차원이 아니라,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을 향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징계를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징계 받는다는 말 자체를 싫어합니다.

냐하면 우리의 이해로는 징계 받는다는 것은 이미 죄지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고 또 죄 지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 자존심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엉뚱한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가운데 우리가 가진 상식, 즉 무엇인가 잘되면 착해서 복 받은 것이고, 잘못되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는 그런 잘못된 생각이 교회 안에서 힘든 일을 겪는 사람에게 무작정 회개하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 한번 말하지만 징계는 죄 지었으니까 벌 받아라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힘든 일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죄짓는 자가 되고, 평안히 사는 사람들은 모두 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잘 살아가는 것으로 판단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이 편히 잘 사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징계는 우리의 소원과 마음을 세상에 아닌 천국에 두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육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헛된 것이며 안개와 같은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육을 치시는 것입니다. 가령 돈을 손해 보는 일이 있게 하셨다면 그것은 십일조를 하지 않아서 내린 벌이 아니라 돈이라는 것이 그처럼 헛된 것이고 내 수중에 있는 돈의 주인이 내가 아니기에 돈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을 의지하고 돈을 바라보던 마음을 돈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두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징계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돈을 손해 보게 해서 내가 십일조를 안 해서 이런 징계를 받았으니까 십일조를 잘하면 다시 복을 받아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갖게 하기 위해 징계를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아들이기에

오늘 본문도 보면 징계를 벌이라는 의미에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12:4-8)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징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아들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길을 망하는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돌려놓기 위해 아들을 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는 아들이라는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래서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12:5)고 하시는 것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에 우리가 낙심하는 것은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엔 믿음으로 잘 살았고 벌 받을 이유가 없는데 징계가 주어지니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답게 만들고, 좋은 곳에 영원히 있게 하기 위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만이 낙심에서 벗어나 감사하는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난과 어려움에 대해 쉽게 이해를 못하는 것은, 고난과 어려움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시각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만한 죄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고난과 어려움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만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욥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천국에 두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육을 치시는 것입니다. 육의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린 문제임을 알게 하셔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아들이 아닌 자에게는 징계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도록 내 버려두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편안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 마음은 세상에 빠진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마지막은 멸망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24-32)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 중의 하나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징계하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킬 기회 조차 얻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에게 해당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에 아무나 들어올 수 없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세상이 편히 잘 사는 것을 보고 부러워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삶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징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고 내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에 붙들려 있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징계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신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징계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징계가 나의 마음을 고쳐서 하늘에 모든 소망을 두게 하시고 영원한 그 나라에 있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았기에 그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인간적 욕망에서 벗어난 자가 아닙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은 자녀가 아닌 자처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을 십자가에 피 흘리신 아들에게 두게 하시고,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일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의 나라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 자체가 신자에게는 고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피 흘리기까지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12:4)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 우리에게 대항하지 아니 하고라는 말씀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고 대항함으로써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이 없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피 흘리면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없기에 죄에 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뜻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끊임없이 징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징계는 신자된 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기쁨은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사랑하셔서 징계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붙들어 놓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기쁨이 없기에 피 흘리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이 없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되고 그것이 기쁨이 되어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세워 가십니다. 그 과정은 어려울 수도 있고, 힘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것임을 알기에 그 하나님의 손길을 온전히 누리며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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