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09,759
오늘 : 25
어제 : 286

페이지뷰

전체 : 78,732,791
오늘 : 51
어제 : 1,883
조회 수 21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본문 / 12:14

 

1. 관심사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고 합니다.

또한 누가복음 24장에도 보면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24:25-27)고 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모세 오경과 그리고 모든 선지서의 내용이 예수님에 대한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논해서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모여서 성경을 이야기한다면 그 주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되고 또 세상에 모든 가치관을 둔 우리의 인생이 주제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경 이야기가 참으로 따분한 내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14)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라는 주제에 모든 관심을 두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심각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는 것에 대한 결과를 주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라는 주제에 모든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주를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곧 그의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절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하는 이 말은 전혀 절망적인 내용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서 절망은 오직 그의 관심사인 세상과 모두 연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들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화평함과 거룩함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연히 시큰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신자가 예수님께 마음이 가게 되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세상이 보는 것은 단지 몸이 살고 죽는 것에 불과하지만 신자는 예수 안에서 그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까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몸의 죽음에 대해선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몸의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또 막아낼 수 없는 거대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 앞에서는 절망을 알지 못하지만, 육신의 죽음 앞에서는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세상에서의 죽음이라는 것은 항상 실패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육신의 죽음을 뛰어넘는 다른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곧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죽음을 이기게 되는 것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곧 영원한 생명임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는 말이 그냥 덤덤하게 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제로 하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항상 부활의 능력이신 예수님께 마음이 있지 않는 사람들은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마음이 향해 있는 신자들만의 대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주제, 즉 교회나 세상에 가치관을 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그리스인은 도무지 끼어들 수가 없게 됩니다. 사실 모든 관심이 예수님께만 있는 신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구역질만 날 뿐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관심이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기를 소망합니다.

 

2. 화평

오늘 본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교회만 열심히 다니고 성경 보고 기도하면서 신앙생활 잘하면 천국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천국에는 갈 수 있지만 주는 만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를 볼 수 없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지옥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 본문의 말씀은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멸망을 받는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예수님도 믿어야 하고 또 화평함과 거룩함도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는 것 자체가 믿음이라는 것이며, 화평함과 거룩함이 믿음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화평을 인간관계에서의 화목으로 이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화평은 인간적인 화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을 화목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결국 화목하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고 또 화목하지 못하면 지옥 간다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그들만의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모두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에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이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필히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인해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내심으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에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은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13-16)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원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들이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들이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과 화목 되지 못하고 원수의 관계에 있던 인간의 참담한 실체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인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받게 하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화평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화평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불만과 원망으로만 반응합니다. 물론 자신에게 유리하고 세상의 복이 주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하고 고통스럽고 힘든 문제가 주어지고 그 문제가 자기 인생을 실패로 이끌어가게 되면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시느냐?’며 불평과 원망을 내어놓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불화의 관계에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루신 화평의 관계에 있는 신자라면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이루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아무리 힘든 고통과 어려움의 문제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 또한 자신을 생명의 나라에 굳건히 붙잡아 두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일로 바라보면서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주만 바라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즉 믿음이 있기에 믿음에 의해서 이러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지 신자가 자기에게 있는 믿음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화평은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된 것이지 세상과 연관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평화가 교회의 일이 될 수 없는 것이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신 것처럼 말하는 것 역시 성경과 상관없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세상에 평화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평화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스포츠 등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경쟁이며 자국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세상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평화는 다만 인간이 꿈꾸는 이상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피로써 화평을 이루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의 피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악함을 바라보며 애통해 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바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 있는 자신을 보는 사람들이고, 그것이 곧 영원히 비참한 처지로 끝날 멸망임을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만이 화평을 이루신 예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화평을 이렇게 이해해 본다면 화평을 따르라는 것은 화목해져 라는 의미가 아니라 화목제물로 오셔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거룩

거룩함을 따르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해질 것을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거룩할 수 없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4-16)고 합니다.

여기 보면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거룩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거룩을 보여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한 것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줄 자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경에서의 거룩은 세상과의 구별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죄악된 세상과 철저히 구별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을 입었다는 것은 신자 역시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하나님께 부름을 입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거룩하라는 말씀 역시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별된 존재로 사는 것이 곧 자기 사욕을 좇지 않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신자인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부르는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기 때문에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진 채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해서 살아가는 종교인의 모습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고, 천국을 말하면서도 소망을 세상에 두고 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신 길은 회피하고자 하는 종교인의 삶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이 가져오실 완성된 그 나라를 소망하면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이끌려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거룩한 삶은 자신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고 또한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져오실 은혜를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에게 어떤 환경이 주어진다고 해도, 설령 시련과 고난이 계속된다고 해도 신자는 자신이 주님에게 붙들려 인도 받고 있는 그 나라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욕을 좇지 않는 것입니다.

련과 고난이 있을 때 힘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 마음조차도 자신의 욕망으로 여기면서 시련과 고난에서 나타내고 보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거룩은 예수님의 의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의를 믿을 때 예수님의 의로우심 안에서 거룩한 자로 여김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의 활동이 거룩한 것이고, 예수님의 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을 두고 거룩하다고 일컫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있게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주를 따르지 않는다면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주가 아닙니다. 내가 주라고 일컫는다고 해서 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보내신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신 주가 되시기 때문에 주를 따르는 문제에서는 항상 주의하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과 더불어라는 말을 하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즉 주를 따른다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 홀로 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개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개인이 없습니다. 몸의 관계 안에서 지체가 있을 뿐입니다. 내가 주의 성전이면 함께 하는 지체 역시 주의 성전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있어서 서로 유익을 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항상 화평과 거룩을 밀쳐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포기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감사에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2022 4월 3일 / 히브리서 70. (히 12:14)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관리자 2022.04.03 212
591 2022 3월 27일 / 히브리서 69. (히 12:9-13) 하나님의 징계의 유익 관리자 2022.03.27 236
590 2022 3월 13일 / 히브리서 68. (히 12:4-8)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심 관리자 2022.03.13 238
589 2022 3월 6일 / 히브리서 67, (히 12:3)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관리자 2022.03.06 174
588 2022 2월 27일 / 히브리서 66. (히 12:12-2) 온전케 하시는 이 관리자 2022.02.27 180
587 2022 2월 20일 / 히브리서 65. (히 12:1-2) 예수를 바라보자 관리자 2022.02.20 229
586 2022 2월 13일 / 히브리서 64. (히 11:39-40) 더 좋은 것 관리자 2022.02.13 222
585 2022 2월 6일 / 히브리서 63.(히11:35-38) 믿음과 고난 관리자 2022.02.06 183
584 2022 1월 30일 / 히브리서 62. (히 11:32-34) 그들은 믿음으로 관리자 2022.01.30 170
583 2022 1월 23일 / 히브리서 61. (히 11:31) 믿음으로 라합은 관리자 2022.01.23 191
582 2022 1월 16일 / 히브리서 60. (히 11:30) 믿음과 여리고 관리자 2022.01.16 162
581 2022 1월 9일 / 히브리서 59. (히 11:29) 믿음으로 홍해를 관리자 2022.01.09 181
580 2022 2022년 1월 2일 / 신년감사예배 / (마:15-12-14) 함께 세워져 가느니라 관리자 2022.01.02 210
579 12월 26일 / 성탄예배 / (눅 1:26-38) 은혜를 받은 자여 관리자 2021.12.26 150
578 12월 19일 / 히브리서 58.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 예식을 정함 관리자 2021.12.19 103
577 12월 12일 / 히브리서 57.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관리자 2021.12.12 128
576 12월 5일 / 히브리서 56.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관리자 2021.12.05 115
575 11월 28일 / 히브리서 55. (히 11:23)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관리자 2021.11.28 160
574 11월 21일 / 추수감사 / (신16:16) 이스라엘의 3대절기 관리자 2021.11.21 330
573 11월 14일 / 히브리서 54. (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관리자 2021.11.14 151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