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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본문 / 고후 7: 2- 7

 

 

1. 바울의 마음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바울은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나누었던 “마음을 넓히라”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마음이 좁아지고 영접하지 아니한 이유를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 하려고 하면 말리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도를 하는 성도들조차 아직 전도가 되지 않은 상태인데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오면 성도들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될까 해서 하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바울사도에게 좁아진 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자란 교회에 나오지 아니하는 그런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단이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하듯이 겉으로는 잘 믿는 모양 같은데 속은 그렇지 않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따라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라면 자기를 깨끗케 하여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합니다. 왜 바울사도는 자꾸만 마음을 넓히라 하며 또 마음으로 영접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 교회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영접치 아니하면 그냥 옷자락을 떨쳐 버리고 가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고 가라고 하셨는데 왜 자꾸만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 영접하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제자들을 영접하지 아니하면 발에 먼지를 털어버리듯이 하라는 말씀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9장입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눅9:5)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실 때에 제자들을 영접하면 그 집에서 먹고 마시고, 영접하지 아니하면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0장에도 보면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눅10:10-12)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70여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여기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위는 유대인들의 오랜 관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지나는 경우에 마을을 통과한 뒤 발의 먼지를 떨고 이스라엘의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는 이방 지역에서 묻은 옷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들어갔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성별 의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정한 것을 자신들의 땅으로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식적 행동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 받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구분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영접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발의 먼지를 떠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거부한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사실에 대한 공적인 선언이자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했을 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일러둠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낙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과 영접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참으로 무서운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왜 그렇게 하지 않고 다시 영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정당하다면 억울해도 기다리면 될 텐데 마치 변명을 하는 것처럼 또는 자존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마음으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12제자나 70여명의 제자들에게 영접하지 아니하면 너희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는데 바울사도는 왜 영접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자 인줄 알기에 그렇게 나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자신에 대하여 오래 참아주셨는지를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단의 괴수로 보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단칼로 처단하는 것이 주를 위한 것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가다가 도리어 예수님께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을 주님께서 그렇게 오래 참아주신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자신에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행한 일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주 약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된다고 사람들에게 교만하게 함부로 말을 하였는지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옳고 정당하기에 더욱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였는데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네 손해지 내 손해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온전하여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전엔 그런 마음을 품으면서도 그 마음을 품는 것이 하나님께 부끄러운 일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제 스스로 잘난 체 건방진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바울을 보며, 바울 같은 사도가 무엇이 부족하고 아쉬워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애걸하듯이 다시 영접하라고 하면서 말하는지 그 마음을 한번 알아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의 삶과 믿음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후7:2)고 합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면서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후7:3)고 까지 합니다. 우리는 바울사도가 고린도 전서를 보내면서 고린도교회에 심한 책망을 한 것을 압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은 정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도리어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있기에 함께 죽고 함께 살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공동운명체인 것입니다. 여기서 함께 죽고 함께 산다고 해서 바울이 죽을 때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함께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한 지체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11:28-29)고 합니다. 바울은 밖으로 오는 환난만이 아니라 속으로 눌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를 위한 근심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약하면 자신이 약하고, 누가 실족하면 사도가 애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라면 반드시 이런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손가락이 주물러서 아픔을 풀어줍니다. 달리기를 해서 다리가 고생해서 일등을 하면 손이 상을 받고 목에 메달을 겁니다. 이처럼 함께 죽고 함께 살 운명이 성도의 관계인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자신을 오해한다고 할지라도 한 몸이 되게 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그렇게 일하고 계시기에 마음으로 영접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7:4)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한 몸이기에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몸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말하고서는 근심이 되었습니다. 너무 심하게 말해서 고린도 성도들이 낙심하지는 않았는지, 그들의 마음이 더욱 닫히지는 않았는지 염려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가 바울에게 옴으로 모든 환난 가운데서 위로와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환난과 위로가 무엇이겠습니까? 5절입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고후7:5)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 육체가 편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사도 그러면 죽음도 불사하고 용감하게 열심히 복음을 전한 불굴의 투사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환난과 핍박 가운데 그는 두렵고 떨었습니다. 밖으로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험난한 전도 사역과 질병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으며, 사방에서 대적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였고 또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고린도 교회에서 어떤 반응이 나타났는지에 대한 염려로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신앙이 좋은 상태라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환난과 핍박이 와도 초연하게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초인처럼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의 유유자적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치열함 싸움이 있고 두려움과 근심이 있습니다. 그런 두려움과 근심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었음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라면 그렇게 살지 않을 텐데 그런 자신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에 감격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한 두려움과 근심이 세상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살까 싸움은 아닙니다만 분명한 것은 바울도 온갖 환난 속에서 두렵고 떠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렇게 두렵고 떨면서 무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바울은 약하고 두렵고 떨었지만 전도란 성령의 나타남으로 되는 것이기에 자신은 그런 모습은 부인되어 지고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보았습니다만 거짓 사도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완벽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자들을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람에게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면 도저히 사도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을 볼 수 있는 믿음의 시각이 있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위로하심

그러면 왜 바울이 마게도냐에 가게 되었는지 고린도후서 2장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후2:12-13)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기다렸는데 디도가 오지 않자 다음 약속장소인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서 디도를 기다린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올 디도로 인하여 또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디도를 만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7:6-7)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다고 합니다. 디도가 가지고 온 소식은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고서 회개하고 또 디도가 고린도교회에서 받은 위로를 전하여 바울이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가 바울을 사모하고 애통하고 바울을 향하여 열심이 있는 것을 고함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완벽하게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도가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온 것에 대하여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죽도록 수고를 합니다.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면서 밖으로 환난과 다툼과 자지 못함과 잘 먹지 못함으로 육체는 편치 못하고 속으로는 교회를 위한 염려로 두려움과 근심이 가득합니다. 그렇게 수고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주셔야 위로가 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에게 목회성공이나 세상의 자랑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디도가 가지고 온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여 다시 복음을 사모하게 되었다는 그 소식이 가장 큰 위로가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데살로니가후서 1장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1:3-12)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복음으로 환난을 당하는 자는 안식으로 갚으시고 복음을 핍박하며 환난 당하게 하는 자를 환난으로 갚으신다고 하십니다. 그 환난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인 것입니다. 그러한 심판과 은혜를 바울사도가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다시 복음에 대하여 사모함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지금 무엇이 위로가 되십니까? 자신이 비천한 자 임을 모르는 사람은 오늘 말씀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바울처럼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의 나의 모습을 확인하여 오늘 말씀을 통하여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주님의 위로가 우리의 심령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영접하지 아니하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그럼에도 바울사도가 자존심조차 없는 자처럼 자신을 영접하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마음이 좁아졌음에도 바울의 마음에는 고린도교회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자신을 둘러싼 환경 탓에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도 바울이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사도바울과 거짓 사도들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6. 죽도록 수고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7. 디도가 전하여 준 소식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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