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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우리가 해야 할 일

본문 /  마27:35-44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십자가형은 흉악범이나 노예 그리고 반역자들에게 했던 처형 방법인데 예수님은 반역자도 노예도 흉악범도 아니기에 사실은 이 십자가형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형을 당하시는 것은  그 당시 예수님을 처형을 주장한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의 증오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도 아니면서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여 자신들을 놀래 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병정들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정신병자나 미친 사람으로 여기고 그래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이 자리까지 왔다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조롱하는 소리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우리는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십자가의 의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27:39-43) 바로 이것이 저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근거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관에 의하면 예수께서 진정한 메시아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지금 이런 모습으로 십자가에 처형당할 리 없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 진정한 메시아의 직무요,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사 이루시고자 하는 진정한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가지는 예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가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밑에서 사람들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의 메시아 직을 정치적 군사적 해결로 요구했던 그 요구를 지금 우리도 보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라는 것을 인정하고 증명해야 된다는 저들의 생각이나 또 우리가 생각하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 주어서 인정받고 증명되게 해야 된다는 내용들이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져야만 했던 예수님의 메시아의 직무를 오해하고 십자가에서 걸어 내려오는 것이 더 메시아답다는 기대 속에 우리의 신앙에 대한 보상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들이 가지는 이런 기대와 요구는 마태복음의 시작부터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1-3)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시작 때 사단의 시험입니다. 여기에도 오늘 본문과 같은 요구가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어어든’ 이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8:1-3) 하나님의 말씀과 떡을 비교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에 인용한 것입니다. 바로 사람들의 모든 문제는 환경에 있지 않고 자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죄 밖에 짓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주면 우리는 죄를 안 짓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경과 조건인 떡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고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짓는 게 내가 원하지 않는 환경과 조건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내게 얼마나 차고 넘치는 죄의 본성이 가득한 것인지를 모르기에 그런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죄의 본성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의 본성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죄 밖에 짓지 못하는 우리의 본성을 바꿔 놓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우리의 본성을 삼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환경과 조건이 아닌 본성을 바꾸시는 게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앙을 확인 할 때 마다 이 십자가를 제대로 통과 했나 자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일괄된 사상입니다.


2. 변화

마태복음 7장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7:15-19) 열매라는 것은 그 나무가 그 나무이기 때문에 그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열매를 떼어 낸다고 해서 그 나무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인을 하는 것은 미움이라는 나무이기에 살인이라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더러운 나무이기 때문에 더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열매를 다 떼어 낸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더러운 나무일뿐입니다. 그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려면 열매만 떼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바뀌어야 되는 것이고, 그 나무가 바뀌지 않은 이상 열매가 있다 없다는 별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 했느냐를 볼 때 나무가 바뀌었는가를 봐야지 열매가 있나 없나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논하면서도 서로 미워하며, 싸우며, 시기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우리는 지금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바뀌어 놓으려는 것, 즉 죄인에서부터 새사람으로의 변화로의 자기 점검은 굉장히 약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대표적 본질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진 자기 죽음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 앞에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멋진 베드로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단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십니다. 결국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한 것이고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매일의 삶 가운데 발생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같은 내용의 말씀임에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고 하여 ‘날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 앞에서 죽는 자입니다. 이때의 죽음은 옛사람의 죽음이며, 죄인의 죽음이며, 떡으로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죽음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혼자 의와 진리와 거룩을 만들 수 있다고 믿던 자 그러면서도 실상은 파멸 이외에는 만들어 내지 못했던 자, 싸움과 더러움 외에는 만들지 못했던 자의 죽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병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치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한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현실은 늘 절망과 갈등의 연속입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은 모두 다 승리의 노래인 것 같은 시편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편 119편입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시119:176) 이 시편 저자는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치 길 잃은 양과 같이 절벽 끝에 선 마음으로 목자이신 주를 찾는 것입니다. 여기엔 승리와 넉넉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으로 자기를 십자가 앞에 세우는 점검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남의 눈의 티를 찾기에 바쁩니다. 원래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깨달으면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이 고민 할 수밖에 없고, 절망 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하는 방법 밖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과하여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한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바로 환경과 조건처럼의 세상의 위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위로를 받습니다. 바로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비로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참된 의미와 가치의 그 특권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하면 우린 언제나 원초적인 본능에만 사로 잡혀서 자기는 잘났고, 남은 못났으며, 모든 책임은 네 탓이라고 하며 모두가 남만 탓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정답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세상과 환경의 문제 그리고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죄인이며,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비명밖에 지를 게 없는 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으며, 우리 교회가 지역 사회에 무슨 영향을 줬느냐가 아니라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역사적 책임인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의 선택과 자랑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많이 하더라가 아니라 이 교회에 오니까 십자가를 제대로 가르치며, 여기 오니까 신앙생활이 뭔지 제대로 가르치더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훌륭함은 그 교회를 참석하는 자들의 변화에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선교를 많이 하고, 그 교회가 커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할 일은 안하고, 그것으로 대치해서 그것을 했다는 것으로 핑계되고 넘어가 버린 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십자가를 지고 싸우셔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진정한 보상은 우리 안의 변화입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입니다. 이 환희와 변화에 대한 감격이 없으면 기독교라는 것은 무엇으로도 그 가치와 보상을 해 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권면을 하십니다.


3. 신앙생활의 본질

에베소서 5장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1-2)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 오라’는 우리의 조롱에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심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우리가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희생과 자기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를 희생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같이 우리들도 그런 사랑으로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불신자는 자기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기뿐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 주기를 원합니다. 자기 맘에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들면 화가 나고 짜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하면 나는 늘 주를 위해 삽니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증인으로서의 책임을 알아서 우리는 늘 죽습니다. 지체의 기쁨이 나를 통과하면 그 기쁨이 증폭 되고, 지체의 슬픔과 아픔이 나를 통과하면 감소됩니다. 나쁜 일이 나에게 오면 소멸 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과한 자만이 가지는 본질적인 변화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수모를 감수하셔서 우리에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는 말씀처럼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십자가를 통과 한 자 같이 말하고, 십자가를 통과 한 자 같이 일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과한 자의 말과 일은 그 앞의 말씀에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2-17)입니다. 교회가 이 시대와 이 사회에 할 일은 사회봉사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세상의 세력이 되면 안 됩니다. 단지 우린 십자가를 진 빛이고, 소금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유일한 증인인 것입니다. 사람이 십자가를 통과하면 그 사람이 변해서 자기가 속한 곳에서 그 시대와 사회를 그리고 그 나라를 변화 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행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사역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도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사회의 저명인사가 되면 하겠다는 식의 신앙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보상해 달라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사랑과 배려와 섬김과 상대의 유익을 구함이 있겠습니까. 이 싸움을 하셔야 합니다. 각자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 싸움을 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 받은 사람답게 우리가 속한 모든 곳에서 그 사랑을 표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기독교가 뭔지,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는지 거기에 대해 입으로만 답하는 자가 아니라 삶속에서 답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애가 변할 것입니다. 주를 아는 기쁨과 새 생명을 얻은 환희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변화 된 자신의 모습에 대한 감격들 그래서 만들어 지는 하나님의 사람들만의 그 거룩한 특권들을 우리가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한 자들과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내려놓고 쉬는 자들에게도 그 사랑을 비추시어서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통과 한 자들이 생겨나며, 내려놓은 십자가를 다시 지고 주를 좇는 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영광 돌리며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메시아답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마태복음 7장에서 우리의 열매보다 십자가를 통과했느냐가 중요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음으로 죽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우리 신앙생활의 정답은 언제나 자신에게로 돌아 올 수밖에 없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5.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죄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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