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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성경 /  요17:17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거룩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결함, 깨끗함, 구별된다.’는 등의 의미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이전의 문제로서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거룩함입니다. 성도를 부를 때에 거룩한 무리란 의미는 그 소속과 신분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라는 뜻으로 불려지는 것이고, 바울의 서신서에도 항상 등장하는 ‘아무 교회와 성도들에게’라는 식의 표현도 소속과 신분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거룩함이란, 그런 소속과 신분에 관한 문제만이 아닙니다. 만약 소속과 신분에 관한 문제라면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절)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난 거룩함이란 성도로서의 수준과 그 완성적 차원에서의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거룩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소개될 때에 그 내용의 핵심은 ‘예수 천국 불신 지옥’으로서 복음을 가장 간단하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금 교리적으로 들어가자 우리가 얻은 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 얻은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이기에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예정론이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의 운명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기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며, 바로 그 같은 확인 아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해야 할 일, 즉 전도와 봉사를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구원에 대해 혼동을 많아 하였던 것이 구원의 감격과 확신을 신앙의 전부로 여겼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 감격과 확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감격과 확신은 이제 출발선상에 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마치 완성인양 생각하는 바람에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하는 질문에 죄인이라고 하면 ‘어째서 죄인이냐 의인이지’라는 이야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인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의인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신분과 소속에 관한 한 그런 것이지 수준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스스로를 가리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한 바울이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얻었으나 아직 완성적 차원에서 볼 때에 자기는 죄인이라고 밖에는 더 설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거룩이 바로 이 같은 완성적 차원에서의 문제를 두고 언급된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인이 와서 식사하기 전에 종이 먼저 식사하는 법이 있느냐? 주인이 오면 시중을 들어 식사하게 하고 세숫물도 갖다 주고 다 한 다음에야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때에 주인이 잘 했다고 하면 종은 ‘그저 무익한 종입니다. 내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제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한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은 하면 할수록 힘이 난다기 보다 더 두렵고 좌절스런 자신의 모습 앞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 앞에 부끄러운 것이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지나게 되는 과정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철저한 깨달음과 깨어짐으로 날마다 자신을 쳐서 낮추고 겸손해져서 마침내는 은혜의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과 그 확신은 이제 출발 선상에 서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달려가야 할 거룩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가야 할 힘겨운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과 육신의 사람으로서는 한 걸음 조차 내디딜 수 없는 절박한 순간들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거룩함을 향해 걸어가야 할 우리 성도들을 위한 기도가 오늘 주님께서 언급하시는 거룩함인 것입니다.


2. 거룩의 완성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우리가 얻은 구원이 출발에 불과하며 완성을 향하여 걸어야 할 길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13)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구원을 얻으면 다 되었다고 하는 잘못된 발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니 나에게는 어떠한 부족한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임에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믿음이 약하여 악한 영들이 병고와 근심을 일으키며 어려운 일들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에 쉽게 현혹되는 것은, 우리는 진리를 소원하는 자가 아니라, 내 필요와 소원을 성취시키는 것이 더 절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병만 고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 일만 해 주시면 뭐라도 할 수 있다는 식의 자기 소원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언제나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채워주시고, 어려운 문제를 없게 해주신다면 ‘죽도록 충성하라’ 혹은 ‘너희가 환난과 고통을 당하리라’는 말씀이 왜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앙은 우리가 망하는 일이 있고, 죽어 순교하는 일이 있어도 ‘내가 이 진리만은 놓치지 않으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해관계와 소원과 욕심에 따라 진리가 흔들리고 영향을 받아선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 신앙은, 편안할 때보다도 위기의 갈림길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그 때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붙잡는지, 진리를 살며시 내려놓고 다른 것을 잡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을 보면 그래도 괜찮은 신앙의 사람이라 기대를 합니다만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거룩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구원이 이런 식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4:13) 우리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15절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신앙을 말씀 할 때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일종의 사상이나 철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것은 거룩한 일이요, 우리가 부름 받은 목표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직도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지 않고 세상에 남겨 두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막아서고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베었더니 주님께서는 떨어진 귀를 다시 붙여 주시며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신자는 복수심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하고도 웃으며, 참으며 말하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저절로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그냥 있으면 절대로 되지 않기에 연습을 하여야 합니다. 나오지 않는 웃음을 웃으며, 안 참아지는 것을 참으려고 스스로 쳐서 복종시키는 거룩한 성품의 훈련이 있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 대라고 합니다. 뺨은 원래 아프라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모욕을 주려고 때리는 것입니다. 오른 뺨을 맞고도 왼 뺨을 돌려댈 수 있는 당하는 자세와 지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도 주라 하심으로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물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빚진 자가 그 빚을 갚지 못 할 때에 속옷은 가지고 가도 겉옷은 가지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겉옷만 입고는 다닐 수 있어도 속옷만 입고는 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주라 하심으로 성도란 물욕에 관한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할 때 십리를 가주라고 합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는 것은 로마가 사람들을 부역 시킬 때에 그 마을에서 오리를 넘지 말라는 법을 시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리까지도 가주라 하여 성도는 법에 매여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존재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권세와 물욕과 복수심에서 해방되는 장성한 자리로 가야 할 자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완성입니다. 


3. 거룩한 변화

그런데 우리는 늘 기도하며, 성경을 들고 다니며,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암송은 잘 하는데 무엇이 변화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변한 것이 없다면 믿고, 외우는 것이 아직 내 것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많이 알고, 외우고 있다고 하여 스스로에 대해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의 모든 삶과 대화중에서 점점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싸움이며, 이것이 잘 되지 않아 갈등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병은 이런 것들에 대해 아파하지도, 잘하려고 몸부림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고 감동하고 결심하며 돌아가는 것만이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참히 깨어져서 다시 주님 앞에 나아와 울부짖는 모습이 뒤이어 나타나야 합니다. 결심만 한다고 세상에 나가 순순히 풀리리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이 너무도 커서 쉽게 무너져 버리는 자신을 바라보고 나의 결심만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아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도우심으로 함께 나아가야함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서는 이런 싸움을 시도해 보지도 않고 위축되어 피해버리는 신자로 숨어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병입니다. 그 생애를 신자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이면 나와 앉아 있습니다. 신자로 살고자 하는 시도도 없으며 그래서 생긴 상처와 짓밟힌 처절함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신자로서 살아야함을 세상에 발을 딛는 순간 잊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에 대한 갈등도 상처도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변화되고 거룩하게 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의 뼈아픈 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21:28-32) 이렇게 아는 것과 사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고 결심을 주셔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쉽게 되어지지 않기에 온갖 고난을 통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30)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은 그 고난을 통해 우리가 크고 변하기 때문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없이도 출애굽을 행하시며, 에스더가 없이도 이스라엘을 하만의 손에서 능히 구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하만의 손에서 구출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모세와 에스더를 사용하신 것은 그것이 모세와 에스더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에스더가 안하면 다른 사람을 세워 그 일을 성취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유능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며,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사용하시면 유능하게 쓰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긍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써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최고의 덕을 보고 있는 자들이 우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일을 많이 해서 가장 유익을 얻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도 각 교회들의 형편에 따라 그 성도들을 향해 기다리며, 오래 참고, 온유와 겸손과 눈물과 기도를 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자신이 가장 거룩하게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큰 일꾼이 된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이 일을 통해 나를 고치시고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자녀와 가정과 사회를 허락하시고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신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크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우리 안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주의 마음을 품고 살기로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이 같은 거룩을 향한 여정이 예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과 은혜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은혜를 더 크게 하려고 죄에 자꾸 빠져야 하겠는가 하는 질문이 로마서 6장에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6:1) 하나님께서 구원 열차에 태우신 것은 목적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역에 있는 가락국수나 먹는 재미로 올랐다 내렸다 하면서 죽는 날까지 ‘차를 타기만 하면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신다.’고 하며, 세상에 나가 죄 짖고 돌아와 또 용서 받고 하다 인생을 다 보내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제는 가야할 목적지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는 4절에 보면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 우리는 거룩한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에도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거룩이요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 성도들임에도 가야할 곳은 가지 않고 세상에 나가 놀며 딴 짖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돌아오게 하실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얻어맞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된 아름다움인 거룩한 자로 만들어 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이 신앙의 길에 순종시키고 애쓰며 기도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인이 아니므로 죄에게 우리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나를 주님께 맡기며 성령에 의해 이끌림을 받으며 의와 거룩을 위해 우리 자신을 구별하십시오. 그 구별된 삶의 마지막은 영광이요, 존귀요, 생명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 때문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더 많은 변화와 거룩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제 이만하면 됐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바울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권면에도 구원에 대한 잘못된 발상이 나오    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장성한 자로 세워지는 거룩의 완성은 어떻게 표현되어 집니까?

4.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있는 최고의 병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에게 복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은혜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이해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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