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본문 / 요 1: 9-13
1. 착각
우리 중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그것은 누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만을 하기에는 뭔가 꺼려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믿게 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신자가 전도를 할 필요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하신 것이라면 굳이 인간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전도 해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하는 의구심이 남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신다는 것과 인간이 해야 한다는 것을 같이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말이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이 말이야말로 주님이 일하시는 것과 또 인간이 일한다는 것이 같이 충족되는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인간 양쪽 다 서운함이 없는 적절한 대답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인간이 말을 잘하고 설득만 잘하면 다른 사람도 그리스도를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전도, 인간에 의한 전도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믿음이 인간의 언어나 인간의 설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9-11)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말씀에 의해서 지어진 바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주인은 말씀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세상을 방문했을 때 세상은 주인을 알아보고 영접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주인이 오되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를 않았습니다. 주인을 알지 못하고 주인에게 복종하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신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주인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않고 함구하셔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까? 그러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가를 사람들에게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는가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취급을 했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한 말을 하는 불경스러운 자로 여겼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고 자신을 직접 드러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과연 우리가 찾아가서 예수님에 대해서 말을 조리 있게 잘한다고 해서 그 말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시 예수님은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해서 사람들의 반발을 산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이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지 못해서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서 십자가에 죽게 된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람의 말재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말하는 전도 역시도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즉 전도를 ‘사람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게 되는 것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내가 저 사람을 전도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지’라는 사람의 뜻이 성취되어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자는 이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선택되어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1-15)고 합니다.
여기 보면 두 종류의 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생명책이고 또 하나는 무슨 책인지는 모르지만 복수로 표현되고 있는 책들입니다. 그리고 복수로 기록되어 있는 책들에는 죽은 자들, 즉 둘째 사망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고, 생명책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할 때 바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진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는 누가 하나님의 택한 자인가를 모르는 우리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할 일은 분명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자기 백성을 찾는 일이 곧 전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전도는 안 믿는 자를 우리가 믿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찾는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동참 되어 졌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전도가 우리 자신의 욕심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전도가 자기 욕심이 되면 결국 내 교회로만 출석하도록 하기 위한 전도가 될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무관한 전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하여금 전도하도록 하시는 것은, 이미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믿는 자를 보내서 부르시기 위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한 자가 아니라면 그 어떤 사람의 조리 있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한다 해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부흥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람의 재주와 연관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 전도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했는데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믿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게 성취됨으로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을 두고 자신을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혹 남들보다 좀 더 나아 보이는 믿음의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믿음의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의 능력이지 우리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세상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인을 알아보고 영접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주인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베풀어진 은총이며 능력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로 산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점이라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항상 받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증거물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곧 사탄의 종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운명이 믿음이 주어짐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바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은 아무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말 만하면 그냥 던져주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여 자기 백성들 삼으신 이들에게만 선물로 주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받은 것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받고 싶은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생각하며 섭섭해하는 경우가 많은 게 우리입니다.
우리는 애당초 예수를 영접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알아보고 영접할 지혜와 깨달음이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기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에는 관심이 없고 항상 다른 기적에만 마음을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전혀 기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가령 우리가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자 ‘지금은 바빠서 안되고 나중에 믿겠다’고 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과연 바쁜 세상일 때문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바쁜 일이 사라지고 한가해지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바쁘다는 것 역시 그냥 예의상 말하는 핑계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의 방해물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한가해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생각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이 믿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중대하고 급한 일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믿음에 대해서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주어졌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기적인 것입니다.
3. 신자의 삶
그렇다면 믿는 것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면 그럼 믿지 않는 것은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교회를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교회를 나오지 않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지울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사람인 것입니다. 그 마음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육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질 때 그 마음은 탄식을 하며 애통해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연약함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탄식하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역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탄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 역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는 탄식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탄식이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에 믿음에 의해서 되어지는 탄식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그 기쁘신 뜻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서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자 마음 먹는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마음은 이미 신자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자 할 때 그 마음이 경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들었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를 끊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붙드신 이상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하나님을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혹 선물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신자의 신앙이 쉽게 흔들리는 것은 ‘나는 믿는데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는 것이지 세상의 삶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결과는 천국이지 이 세상의 풍요로운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보다 더 가치있는 선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에 힘이 없다면 믿음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스스로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며 은혜의 선물이며 또 신자가 자랑할 유일한 것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기적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초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일이 끝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자로 택함받고 부름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가는 신자를 흔들자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자는 없습니다. 그 무엇도 우리를 생명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권세가 없습니다. 이것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신자의 힘이요 권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은혜의 선물인 믿음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신자가 원해야 하는 삶은 바로 이런 삶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이 바로 신자가 추구해야 하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