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도가 부를 새 노래
본문 / 계 5: 9-14
1. 찬송의 기준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찬송'입니다. 찬송을 부르지 않으면 예배가 아니라고 생각할 만큼 예배는 교인들의 교회 생활 속에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찬송을 많이 부르고 또 좋아하는 찬송도 한 두 곡씩은 있을 줄로 압니다. 일을 하다가도 콧노래로 찬송가를 흥얼거리는 적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청년이나 학생들은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 찬송이 자신들의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에 복음 성가라는 것에 많이 매료되기도 합니다. 분위기에 도취 되어서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찬송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찬송은 인간이 즐기기 위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한 것인데, 과연 우리들의 찬송이 이러한 찬송인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이란 악기 소리에 맞춰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듣기 좋게 불렀다고 해서 찬송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아름다운 목소리에 듣기 좋은 노래가 찬송이라면 나이 드신 분들의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이 듣기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을 생각할 때 아름다운 목소리, 조화를 이룬 화음, 조용하고 경건한 듯 여겨지는 곡,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찬송을 불렀습니까? 무슨 마음으로 집안에 찬송가 테이프를 틀어놓습니까? 심방을 하면 찬송가 테이프를 틀어놓고 심방을 기다리는 가정이 간혹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 집은 이렇게 찬송가를 좋아합니다'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사실 지금 교회에서 생각하는 찬송이라는 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들이 즐기기 위한 색채가 더욱 강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찬송이 무엇인지, 찬송을 부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단지 '부른다'는 것에만 치중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자기들 취향에 맞는 유행가를 골라서 좋아하고 부르는 것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새 노래'라는 말이 나옵니다. 새 노래란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본문은 '새 노래 가사', 즉 찬송가 가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새 노래를 찬송가로 말한다고 해서 오늘날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 본문의 새 노래입니다. 소위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파이프 오르간에 맞추어서 부르는 찬송가도 새 노래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매료되는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목사들이 찬송을 부를 때는 정성을 다해서 불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른데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불러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데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찬송을 부를 때는 찬송에만, 기도할 때는 기도에만, 설교를 들을 때는 설교에만 모든 정신을 집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오랜 세월을 예배를 드리며 살아왔습니다. 수없이 많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과연 모든 마음을 찬송에만 두고 기도에만 두고 설교에만 둘 수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혹 찬송에 마음을 둘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환경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집안에 문젯거리가 없어서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에 마음이 찬송에 집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으로 인해서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하고 염려가 많을 때 찬송에 마음이 집중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찬송에 집중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복잡하고 염려가 많은데도 찬송에 마음을 집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가대 역시 하나님의 영광에만 마음을 두고 찬송을 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과 화음을 맞춰야 하고 틀리지 않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성가대가 하나님의 영광에 모든 마음을 집중하면서 찬송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은, 인간이란 찬송을 부른다고 해도 결국 자기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이 가사를 적고 곡을 갖다 붙인 찬송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을 불렀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다는 생각은 전혀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노래하고 주님의 희생을 찬송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찬송 앞에서는 자기가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 앞에서는 인간이란 존재는 부인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희생이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임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희생을 제대로 찬송한다면 그 찬송에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찬송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문제로 인해서 걱정을 한다거나, 찬송을 잘 불러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이 부인되지 못한 것이고 따라서 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찬송가의 곡에 신경을 많이 쓰기도 하지만 곡에 잘 맞춰 부른다고 해서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 좋은 곡조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박수는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곡조에서 주님의 희생이 나오고 인간의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찬송이란 단순히 신을 향해서 찬양을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찬송에 여호와라든가 예수님이라는 용어가 들어있다고 해서 찬송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용어들이야 인간들 자의에 의해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렇게 따지고 보면 어떤 노래가 찬양이냐는 것은 인간들 편에서 임의로 정하고 기준을 세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 기준은 하나님이 정하실 문제이지 인간들이 멋대로 정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가령 노래자랑을 하면 심사위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심사를 하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노래자랑을 진행하는 사회자가 기준을 정해서 심사위원에게 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출연자가 자기 마음대로 기준을 정해서 부르는 것입니까? 심사 기준은 어디까지나 심사위원의 몫이고 권한입니다. 노래자랑에 출연했던 사람은 모두가 심사위원의 기준에 맞추어져서 등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찬송이냐는 기준도 인간들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 맞는 찬양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찬송이란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찬양은 땅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린양에 의해서 발생한 하늘나라 백성들입니다. 이들만이 새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가락은 찬양의 요건에 무관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새 노래
하나님의 오른손에는 생명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생명책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명단이 적혀 있는데, 그 명단대로 자기 백성을 반드시 구원해 내는 작업을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고 자기 백성을 괴롭힌 자들을 심판하시는 그 일을 어린양이 하십니다. 새 노래란 바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그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린양의 사역에 참여되지 못한 자는 찬양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영광을 어린 양에게 돌려 드립니다'는 것이 새 노래입니다. 그래서 새 노래는 '내가 산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희생 덕분이다'는 것을 가슴 깊이 인식하고 모든 영광을 어린양이신 예수님에게 돌려드리는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24장로가 면류관을 벗어 던지는 것도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냥 '노래'라고 말하지 않고 '새 노래'라고 하는 것입니까? 새 노래라는 의미는 새 노래 앞에 또 다른 노래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새 노래 앞에 있었던 노래는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맨 처음 노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부른 노래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한 것이 나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하신 일로서 홍해가 갈라진 것을 노래했지만 새 노래는 예수님의 사건,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사건으로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 노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라고 말합니다. 죽임을 당하시고 피 흘리신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피 흘렸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내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노래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나는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만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인 나는 죽고 예수 안에서 새사람으로 산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아는 그들에게서 새 노래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찬송가를 불렀다고 해서 찬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하나님이 홍해를 갈랐다는 이적에 감탄하고 그것을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팔이 크므로 그들이 돌 같이 침묵하였사오니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께서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출15:16)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도 홍해를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즉 우리 역시 홍해 안에서 애굽 군사와 함께 죽어야 할 자들인데 하나님의 구원의 오른손이 우리를 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찬양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이 오른손에 생명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책의 인봉을 뗄 자가 없어서 요한이 울었는데, 어린양이 생명책을 취합니다. 어린양이 생명책을 취한다는 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들을 어린양이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구원의 능력의 손인데 그 오른손에 생명책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의해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생명책을 취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능력은 우리의 헌금이나 기도나 예배나 찬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살리심을 입은 신자들은 필히 어린양의 피를 압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이 구원을 찬양하는 것처럼,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얻은 백성들도 역시 죽음 속에서 우리를 살리신 어린양의 피를 찬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노래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송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새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린 양의 피로써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새 노래를 부르며 사는 신자들은 과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다른 사람처럼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인생을 허비하고 살아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자기 이름과 세상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 삽니다. 예수님의 피가 생명이고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 영광이 귀한 것이 아니다'는 정신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은 이기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아야 합니다. 남을 희생시켜야 내가 잘되고 높아질 수 있는 경쟁 사회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죽은 자로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에서 잘난 인간 되고 높아지는 것은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은 진심으로 예수님의 피만 그 속에 생명으로 자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세상 영광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그 무엇을 발견했기에 그리고 그것을 포기할 수 없기에 과감하게 세상 것을 포기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하늘에서 승리자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3. 왕 노릇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5:10)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땅에서 왕 노릇한다고 말합니다. 땅에서 하는 왕 노릇이란 예수님이 재림하신 뒤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신자로 살아갈 때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는 신자가 바로 왕 노릇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왕 노릇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높아지는 것이고 힘이 있는 것이고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높아지고 군림하고 지배하는 환경이 아닙니다. 욍 노릇하는 모습이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을 현재의 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세상에서 고생을 한 신자들에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그동안의 서러움을 다 씻어 주시고 왕 노릇하게 하신다는 위로의 말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왕 노릇은 현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고 세상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신자를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의가 드러날 때 무엇이 드러납니다. 숨겨져 있던 죄가 드러납니다. 죄의 결과는 곧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죄가 드러나고 세상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음이 증명되는 것은 신자에 의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가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죽은 자로 살아갈 때 세상에 의해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무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세상이 약자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죄 속에 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신자에 의해서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심판을 선포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 위에 군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승리자이고 왕 노릇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많은 사람들은 왕 노릇한다는 것에 대해서 실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왕 노릇한다는 것은 많은 돈을 소유해서 떵떵거리고 살아가고 힘을 가지고 타인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군림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피 앞에서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은 찬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노래는 예수님 덕분에 세상에서 잘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부를 수가 없는 노래입니다.
단지 찬송을 잘 불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령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노래는 연습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가 시킨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것이 새 노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진심으로 어린양의 피의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모든 영광을 주께 드리는 삶을 살아가면 새 노래는 우리에 의해서 불려지는 것입니다. 곡조를 붙이고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서 새 노래가 묻어 나오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할 때 그것이 새 노래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나를 도구로 삼아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는 것을 고백할 때 그것이 새 노래인 것입니다. 그런데 새 노래를 부르며 사는 신자가 과연 자기 일을 앞세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집안에 불화가 있을 때 '하나님, 이 일은 저보고 세상에 애착을 두지 말고 주님만 사랑하라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인 줄로 압니다. 세상의 어려운 것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이것이야말로 고통이든 고통이 아니든 주님의 피로 이루어진 구원만 생각하고 영광 돌리는 새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에 애착을 두고 살아가는가를 드러내는 순간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꾸 우리를 건드리면서 그렇게 건드릴 때마다 우리에게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오직 주님의 피로 산다'는 것이 나오면 신자이지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가 나오면 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기에 세상의 것이 모두 떨어져 나간다고 해도 괜찮다는 것이 어린양의 피로 구원 얻은 백성이고 이들이 새 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사는가를 날마다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이런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에 그 능력이 있음을 잊지 마시고 결코 우리의 것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우린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이루어진 구원에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 외에 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어린양의 피 앞에서는 나의 잘남이 없습니다. 단지 죽어야 할 자로 설뿐입니다. 아무런 가치 없는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신자가 불러야 할 새 노래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1. 우리가 찬송을 할 때 점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우리가 찬송과 기도와 설교에 집중할 수 없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신자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찬송할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4. 찬송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며 그래서 누가 찬송을 할 수 있다고 합니까?
5. 새 노래 앞에 있었던 노래는 무엇이며 또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6. 진정으로 새 노래를 부르는 신자들의 세상에서의 삶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7. 하늘에서 승리자로 여김받는 신자는 어떤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까?
8. 신자인 우리가 오늘 본문에 땅에서 왕 노릇한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땅에서 왕 노릇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만들어낸 내용이 무엇입니까?
10. 신자가 왕 노릇한다고 하는 성경적인 의미와 우리가 생각하는 왕 노릇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11. 오늘날 신자에 의해서 불려지는 새 노래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2. 신자인 우리가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