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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이의 죽음과 아이의 탄생

본문 / 삼하12:24-25

 

1. 하나님을 우습게 여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알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은 믿는 자라고 여기기에 자신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착각에 빠져서 말씀으로 자신을 고치고 점검하려고 하기보다는 타인을 판단하고 고치려고 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마음 그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주의하며 살펴야만 할 것입니다.

나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를 보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된 그 눈으로 타인을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눈에 보이는 타인들은 분명 다른 사람들일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 줄 알기에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내가 비판하고 무시할 수 없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입은 형제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을 통해서도 나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 보면 “15.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삼하12:15-17)고 합니다.

다윗은 병든 아이를 위해 금식을 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이러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이를 살려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가지고 다윗은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이 몰랐던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라는 것은 인간의 어떠한 정성과 간절함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 것은 다윗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법칙으로만 해결되어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사하셨지만 아이를 죽이심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보게 될 때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인간의 정성과 간절함을 동원해서 불쌍히 여김을 받아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서두에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윗처럼 자기 정성과 간절함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가지고 상대하시는데, 우리는 자기 정성을 동원해서 막아 보겠다고 나서는 것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다윗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대신하여 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자신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죽음을 보면서 죄의 삯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오늘 본문을 보면 “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삼하12:24-25)고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이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낳은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하십니다. 과연 솔로몬에게 어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만약 세상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솔로몬이라는 이 아이는 다윗이 승승장구하던 그때에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세력이 확장되어가던 그 시절이야말로 누가 봐도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때 여호와께서 다윗을 사랑하시는 증거로 솔로몬을 태어나게 하셨다면 세상이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일 것입니다. 무작정 나에게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잘 나가던 다윗이 범죄를 하고 첫 아이가 죽은 뒤에 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심을 인하여 솔로몬을 주신 것으로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이 생각하는 상식이나 기준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함으로써 신앙에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세상적 기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또 그러한 사랑을 원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신자가 누릴 수 있는 믿음의 풍성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들이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범죄와 인간의 범죄를 대신한 애매한 존재의 죽음과 연관하여 나타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솔로몬의 등장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첫 아이가 죽은 것은, 다윗의 죄에 대한 징벌의 차원으로 보기보다는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위해서는 필연코 있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일로 보아야만 합니다.

만약 아이의 죽음이 없이 다윗에게 솔로몬이 주어졌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와 뒤섞여서 뒤죽박죽되어 버릴 것입니다. 다윗의 죄를 책임진 존재가 없이 무작정 나타난 사랑이기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정성과 간절함만 보이면 언제든 주어질 수 있는 사랑으로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가 여호와의 원수의 비방할 거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오해를 차단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첫 아이의 죽음입니다.

다윗은 아이의 죽음에서 죄는 인간의 정성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아무리 금식하며 기도를 하는 정성을 보인다 해도, 하나님 앞에 불쌍하게 보인다 해도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일 뿐, 죽음을 막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아이가 죽었음을 듣고 알게 되었을 때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23)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인간의 정성을 동원해서 신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합니다. 정성을 보이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세상의 종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성과 전혀 부합되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성을 보시고 행동하시는 분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솔로몬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증표입니다.

솔로몬의 별명인 여디디야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솔로몬을 다윗에게 주셨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의 기준은 버리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꿈꾸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사랑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욕심일 뿐입니다. 항상 말씀드린 대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만으로도 우리에게는 과분하다는 것을 깊이 아셔야 합니다. 자격도 없고,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우리가 지금 이만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배 출석으로, 봉사로, 헌금으로 또는 예배당을 짓는 것으로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한 모습은 마치 다윗이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아이를 살려 보겠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어 보겠다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성경이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빠져들어야만 합니다. 다윗에게 여디디야,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의 솔로몬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어여만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필히 우리의 죄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는 다윗이 지었지만 그 죄로 인해 다윗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죄가 상관없는 아이가 죽음으로 다윗이 죄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 또한 죄로 인해 죽어야 마땅할 나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나의 죄가 사함 받게 하기 위해 죄 없는 분이 죽어야 했음을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이 죽은 다윗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기 죄에 대한 비통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아이가 죽은 뒤에 다윗이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마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이해하면 안 됩니다. 다윗의 행동은 다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정성과 간절함을 거두는 것일 뿐, 부모로서 아이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은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죄로 인해 아이가 죽었음을 생각한다면 그 마음이 더욱 비통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얼마나 가깝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 죄에 대한 애통함이 과연 우리는 얼마나 크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가족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며 나의 자식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마음이 멀어지기 십상인 것입니다.

재난으로 인해 수십만 명이 죽었다 할지라도 내 자식 하나 죽은 것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수십만, 수백만이 죽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나와 상관이 없고 내 자식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되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말하되 마음은 예수님에게서 멀어진 상태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으심을, 실제 내 자식이 죽은 것과 같은 감정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이 없는 십자가는 이미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는 십자가를 알고 있고 또 십자가를 믿고 있다고 착각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 솔로몬 = 여디디야

다윗에게 있어서 아이의 죽음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솔로몬’(, 샬롬)평강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솔로몬은 다윗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에 있다는 증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다윗의 첫 아이의 죽음인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있어서 첫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사랑하사 화평의 관계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심을 입은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1-2)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다윗의 금식하며 기도를 해도 해결이 안 되는 것처럼 인간 측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죄지은 다윗 대신 죄 없는 아이가 죽음으로 죄를 알고 보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루짐으로 인해 솔로몬이 그 증표로 주어진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기에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의 화평은 용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는 어떻게 주어진 것입니까? 내가 회개를 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 용서입니까?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한 결과인 하나님의 용서가 신자인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는 원인 없는 결과만을 누리게 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죄에 대해 설교하는 것은 무겁고 어두운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복에 대해서, 교회의 비전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밝고 활기 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죄에 대한 설교가 어두운 설교일까요?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넘치시고 깊으신 사랑과 은혜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데도 어두운 설교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평강이라는 뜻의 솔로몬을 주시고, 여호와가 사랑하신다는 여디디야란 이름을 주시는 이 얘기들은 분명 어둡고 무거운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는 밝고 희망이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다윗의 죄를 바탕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인간의 죄가 있기에 은혜와 사랑이 증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7:36-43)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 현장에는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죄 있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죄 있는 여인은 예수께 나아와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죄 있는 여인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이에 예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이 탕감받은 자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탕감받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음을 의미하고 그래서 탕감해 준 분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누가 더 탕감해 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까? 많이 탕감받은 자, 즉 자신의 죄가 더 많다는 것을 아는 자가 탕감한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이라고 여겼던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거하실 때에 발을 닦을 물도 주지 않았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자신이 죄가 많다고 여겼던 이 여인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실감하고 그 용서에 감격한 자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증상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용서를 보여주십니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보여주십니다. 다윗에게는 아이의 죽음과 솔로몬의 탄생으로 이것이 증거 되었고,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증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예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삶의 힘이고 원동력이고 희망이고 비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일 것 같습니다. 다만 멸망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의 의로우심 안에서 의인으로 불리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기적을 안고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너무 힘없이 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신자의 신자 됨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세상과 똑같이 세상을 의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계시록 3장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20)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두드림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를 깨우는 말씀입니다.

행복한 자는 돈과 권력으로 무장하여 세상을 휘젓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행복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을 세상은 건들지를 못합니다. 세상이 가진 힘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를 굴복시키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아예 그런 것들에게서 마음을 돌린 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신자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있다면 다시금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죽으심에서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신 주를 보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맛보십시오. 주님의 다시 사심이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 하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이 생각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이끌어 간다면 우리는 참으로 복된 자이며 행복자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디디야란 이름이 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아는 자들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말씀을 통해 나를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다윗이 병든 아일 위해 금식 기도를 하면서도 몰랐던 것은 무엇이라 합니까?

 

3.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시는 방법은 무엇이었으며 또 그렇게 다윗이 자신의 죄를 앎으로 알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라 합니까?

 

5.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6. 다윗의 범죄로 말미암은 태어난 아이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아이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던 다윗이 아이가 죽은 후에 몸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까?

 

8. 죄는 다윗이 지었는데 오히려 아이가 죽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그것으로 어떠한 마음으로 살게 된다고 합니까?

 

 

9. 다윗의 죄로 인한 첫 아이의 죽음과 그리고 둘째인 솔로몬의 탄생은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다고 합니까?

 

10. 누가복음 7장의 탕감 받은 비유에서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탕감하신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11.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어떻게 살아간다고 말씀합니까?

 

  1. 4월 28일 / 요한계시록 57. (요 16:12-16) 아마겟돈 전쟁

  2. 4월 21일 / 요한복음 39. (요 6:52-63) 걸림이 되는 말씀

  3. 요한계시록 56. (계 16:8-11) 회개하지 아니하는 인간들

  4. 4월 14일 / 요한복음 38. (요 6:47-51)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5. 4월 14일 / 요한계시록 55. (계 16:1-7) 쏟아진 하나님의 진노

  6. 4월 7일 / 요한복음 37. (요 6:41-46) 아버지가 이끄시는 은혜

  7. 4월 7일 / 요한계시록 54. (계 15:5-8) 세상이 심판받는 이유

  8. 3월 31일 / 부활주일 / (삼하 12:24-25) 아이의 죽음과 아이의 탄

  9. 3월 24일 / 요한복음 36. (요 6:32-40) 하나님의 떡

  10. 3월 24일 / 요한계시록 53. (계 15:1-4) 불이 섞인 유리 바다

  11. 3월 17일 / 요한복음 35. (요 6:28-31) 하나님의 일과 믿음

  12. 3월 17일 / 요한계시록 52. (계14:17-20) 하나님의 심판

  13. 3월 10일 / 요한복음 34. (요 6:22-27) 썩을 양식 영생의 양식

  14. 3월 10일 / 요한계시록 51. (계 14:14-16) 하나님 나라의 추수

  15. 3월 3일 / 요한복음 33. (요 6:16-21) 바다를 걸으신 예수

  16. 3월 3일 / 요한계시록 50. (계 14:1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의 복

  17. 2월 25일 / 요한계시록 49. (계 14:9-12) 성도의 인내

  18. 2월 18일 / 요한복음 32. (요6:15) 임금 되기를 거부함

  19. 2월 18일 / 요한계시록 48. (계 14:8) 큰 성 바벨론의 운명

  20. 2월 11일 / 요한계시록 47. (계 14:6-7) 이세대에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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