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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본문 / 6:47-51

 

1. 마귀의 유혹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마귀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귀가 제시하는 것은 사람은 떡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떡이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떡의 문제는 생존을 위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에서 떡은 오늘을 살기 위한 힘이고, 내일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마귀에게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는 삶을 제시합니다. 분명 말씀이 우리의 목숨을 지탱해 주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읽고 말씀을 믿는다고 해도 그 말씀이 우리 배를 부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말씀이 양식이 되어서 우리의 목숨을 유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귀나 또 예수님이나 분명 사는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삶 자체가 각각 다른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말하는 삶은 우리의 생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는 삶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목숨으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존재가 되는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용지물입니다. 생존을 위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떡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만 합니다. 마치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교회에서 부지런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기 보다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생명을 위해서는 떡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마음을 두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떡과 말씀 그 어느 것 하나도 생존과 생명을 동시에 책임지지를 못하기 때문에 결국 어느 것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존과 생명을 동시에 바라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항상 서로 대치되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8절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생명의 떡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고 하는 이 말씀에 대하여 얼마나 절실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사실 항상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 우리로서는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을 대할 때 예수님보다는 세상의 떡에 더 절실한 마음으로 살았던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또 다시 발견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다만 부끄러운 줄 알라는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부족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면 그것으로 오늘 말씀이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자기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해서 신자된 것이 아닙니다. 부족과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부족하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진짜 신자다움인 것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시고 생명을 말씀하는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이 생존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생명의 말씀을 듣는다면 분명 자신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냥 생존의 자리에 머물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단지 부끄러움을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을 깨닫게 하고 부끄러움을 알게 하셨다면 그것은 신자로서 부끄러운 자리를 벗어나라는 의도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즉 부끄러움을 아니까 됐다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자리에 머물지 말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자리에 머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항상 예수님을 부르면서 부끄럽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럽다는 말 한마디로 신자의 자리에 머물려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부끄럽다는 말이 신자를 신자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자리를 벗어나서 신자로서 정당한 자리에 머물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끄러움을 벗어나서 신자로서 정당한 자리에 살아가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2. 만나의 역할

오늘 본문을 보면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6:49-50)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과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었던 만나를 비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나는 먹었어도 죽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만나의 차원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이스라엘이 만나를 바라보던 시각에서 예수님을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나가 내려진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내려지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원망 때문이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이 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이 전혀 없는 배고픈 상황에서 우리를 주려서 죽게 한다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 원망을 듣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만나를 주신 것은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시기 위한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진 것은 단지 하늘에서 주신 신비한 것이라는 차원에서 주신 것이 아니라 만나가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거두어진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루하루를 자기의 수고와 노력으로 거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 바로 만나를 거둘 때 다음날 것까지 미리 거두면 썩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16:17-20)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다음 날 것까지 미리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만나를 통해서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배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음날 것까지 미리 거둔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 내일을 준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존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날까지 남은 것은 썩어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나의 역할은 분명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런 이스라엘에게는 만나를 먹었다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인 은혜를 아는 것이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나를 먹으면서도 결국 생명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만나를 단지 자기 배부름을 위한 것으로만 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나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결코 사람의 배부름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님을 말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26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으로 만족하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는가를 보셨던 것입니다. 자기 배부름, 즉 생존을 위해서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알고 예수님을 찾은 것이냐를 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예수를 찾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을 찾는 것도 아니며 생명과도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3. 신자의 삶

그런데 오늘날 보면 생명과는 상관없이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자기 배부름을 기대하고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만 자기가 선택한 기독교란 종교의 교인의 명목을 유지하는 차원으로서 예수를 찾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일에 교회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예수를 찾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님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로만 인식을 하고 있을 뿐이지 하늘의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 밖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수님이 자신의 일에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할 뿐, 예수님이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나누시기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에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자로서의 부끄러움은 예수님에게서 자기 배부름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로서의 정당한 자리는 예수님에게서 오직 자기 생명을 바라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51절에 보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6:51)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살을 내어놓는 것이지 세상의 배부름을 위해서 이적을 베풀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것은 나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가?’ 일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우리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자기 종교로 선택했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오직 생명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생명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생존보다는 생명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생명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애통해하면서 회개하고 주님에게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생명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전부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죄를 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기뻐하시고 원하는 신자의 자리에서 살기를 소원하고 그것을 위해서 힘쓰며 사는 사람입니다.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힘은 돈입니다. 세상의 지위며 권력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위해 사는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힘이시며 위로자가 되십니다. 물론 이것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압니다. 항상 세상의 생존에 매이는 우리 자신을 볼 때마다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생명이며 진리인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신자로 사는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이며 무엇이 헛된 것이고 무엇이 참되며 진실하며 영원한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인 우리에게는 되어진다 또는 안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루하루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롤 소망하고 살아가는 신자의 정당한 삶입니다.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달려갈 것입니다. 자기의 배부름을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소위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 또한 자기 성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모습을 많이 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굳건히 서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아셨다면 옳은 것 위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무엇이 생명이 있는 길인가를 분명히 하시고 그 길을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위해서 타협하는 길로 나아가지 마십시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안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라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삼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신자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란 말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삶을 수정하면서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신자로서 사는 삶이 되기 위해서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1. 4월 28일 / 요한계시록 57. (요 16:12-16) 아마겟돈 전쟁

  2. 4월 21일 / 요한복음 39. (요 6:52-63) 걸림이 되는 말씀

  3. 요한계시록 56. (계 16:8-11) 회개하지 아니하는 인간들

  4. 4월 14일 / 요한복음 38. (요 6:47-51)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5. 4월 14일 / 요한계시록 55. (계 16:1-7) 쏟아진 하나님의 진노

  6. 4월 7일 / 요한복음 37. (요 6:41-46) 아버지가 이끄시는 은혜

  7. 4월 7일 / 요한계시록 54. (계 15:5-8) 세상이 심판받는 이유

  8. 3월 31일 / 부활주일 / (삼하 12:24-25) 아이의 죽음과 아이의 탄

  9. 3월 24일 / 요한복음 36. (요 6:32-40) 하나님의 떡

  10. 3월 24일 / 요한계시록 53. (계 15:1-4) 불이 섞인 유리 바다

  11. 3월 17일 / 요한복음 35. (요 6:28-31) 하나님의 일과 믿음

  12. 3월 17일 / 요한계시록 52. (계14:17-20) 하나님의 심판

  13. 3월 10일 / 요한복음 34. (요 6:22-27) 썩을 양식 영생의 양식

  14. 3월 10일 / 요한계시록 51. (계 14:14-16) 하나님 나라의 추수

  15. 3월 3일 / 요한복음 33. (요 6:16-21) 바다를 걸으신 예수

  16. 3월 3일 / 요한계시록 50. (계 14:1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의 복

  17. 2월 25일 / 요한계시록 49. (계 14:9-12) 성도의 인내

  18. 2월 18일 / 요한복음 32. (요6:15) 임금 되기를 거부함

  19. 2월 18일 / 요한계시록 48. (계 14:8) 큰 성 바벨론의 운명

  20. 2월 11일 / 요한계시록 47. (계 14:6-7) 이세대에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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