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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진리와 죄

본문 / 요일 1: 8-10

 

1. 죄에 대한 이해

아담의 후손인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와 함께 합니다. 따라서 죄를 말하지 않고는 인간을 말할 수 없고, 죄를 알지 못하고서 인간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죄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까? 인간은 죄에 붙들려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것일까요? 아니면 죄를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일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죄를 말하지만 정작 죄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이 막연하게 말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양심이나 윤리 도덕에 속한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생명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생명과의 단절은 곧 영원한 죽음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서는 느낄 수 없는 훨씬 더 깊은 심각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양심이나 도덕의 기준으로 접근하게 되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물론이고 성경 해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진리가 우리 속에 있다면 자신이 죄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생명과 단절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하나님을 알게 하고 예수님을 알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진리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에 의해서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본래적으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라는 것은 우리의 그 어떤 노력과 힘과 열심으로도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게는 생명이 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를 알게 된다면 생명에 대해, 즉 구원에 대해 인간의 힘은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이 가능하게 된 이유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고 예수님이 이루신 일에 마음을 두게 되고 깊은 감격과 감사가 그 속 깊은 곳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가 알게 하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다면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것이고 또 스스로가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그 앎을 진정한 아는 것으로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 속에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기적은 인간이 자신의 죄의 본질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정당성을 추구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인간이기에 죄의식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의 정당함이 죄의식을 덮고 있기 때문에 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만 더 크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 의해 죄가 부인되는 것입니다. 나는 깨끗하다는 자부심으로 뭉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런 대표적인 부류가 바로 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2. 어둠에 행함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10)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심판하기로 작정하시고 홍수로 쓸어 버리셨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은 노아가 그 당시 다른 사람들만큼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홍수 심판 이후에도 인간의 죄의 본질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노아 홍수 전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창세기 6장에 보면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6:5-7)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말씀대로 지면에서 쓸어버리시려고 홍수로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홍수 심판 후에 인간은 어떠합니까? 창세기 8장에 보면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8:20-21)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인 홍수 전에도 인간은 5절 말씀처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할 뿐이었고 또한 심판 이후에도 21절의 말씀처럼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전후에도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음 이후에 인간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죄인 됨을 부인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들 뿐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5절을 보면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1:5)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어둠은 대개 사건 사고가 많은 빈민가 뒷골목의 세계라 할 수 있고, 빛은 아름다운 선행이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선행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11:6)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인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고 하여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은혜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아덴에서의 바울의 설교 중에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17:24-25)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선행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내놓는 구제를 한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는 말씀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선행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악하며 인간의 악함을 선행으로 가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사람들 보기에 그 어떤 선행이 있다 해도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 진리가 이끌고 그리고 그 진리에 순종하는 신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으로 규정되는 것은 선행이 없다거나 또 선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읽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간의 악도 윤리 도덕적인 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지음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목적을 망각하고 오직 자신의 영광과 성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간의 악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외면한 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자신에게 만족이 되는 인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기에 항상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그리고 자기 기준에 의해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며 나는 죄 없다거나 또는 나는 깨끗하다고 하는 것이 곧 어둠에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둠이 조금도 없는 빛이십니다. 그러면 어둠에 있는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에 있다면 어둠인 우리에게서는 어떤 현상이 있게 되겠습니까? 이런 경우 대개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빛으로 인해서 어둠의 상태인 자신에게 변화가 있게 되어 어둠이 점점 희미해지며 빛으로 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가 말하는 성화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앞에 6절부터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6-7)라고 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에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한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외면한 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자신에게 만족이 되는 인생을 위해 살아가는 악한 삶을 살면서도 항상 자기 정당성과 기준에 의해 자기 스스로가 선과 악을 구분하며 나는 죄 없다거나 또는 나는 깨끗하다고 여기며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과 사귐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고 또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또 진리를 행한다면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외면한 채 자기 유익과 만족을 위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어둠이 빛과 사귐에 있다면 빛 가운데 행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둠이 빛으로 변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까?

그렇기에 이 구절은 무엇보다도 어둠에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해야만 오해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에 행하는 것은 자신의 행함을 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의 행함을 바라보기 때문에 죄인임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기에 자신과 같은 행함이 없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그들보다는 낫다는 시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이 세리를 보면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8:11)라고 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둠에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둠을 도덕과 종교적 행함의 기준에서 이해하게 되면 어둠에 행하는 것은 비도덕으로 살고 또 종교적 행함도 없는 것으로 이해되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생각하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도 결국 도덕적인 삶과 종교적 열심으로 이해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하여 자신의 어둠과 빛을 판단할 것이기에 바리새인과 같은 시각으로 자신과 타인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사귐

그러면 빛과 어둠이 사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어둠이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에 있다면 어둠의 상태에 있는 자신에 대한 자각이 분명해집니다. 그것이 빛과의 사귐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흔히 빛과 어둠이 함께 하면 어둠이 사라지고 빛으로 채워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빛과 어둠을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적 시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서로 사귐이 있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관계에는 사귐은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세리와의 행함을 비교하며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귐은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서는 모든 인생이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잘나고 못난 자가 없이 모두 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은혜가 필요한 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빛과 사귐이 있는 자는 그 빛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든 그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악하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으로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없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말씀합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고, 죄를 자백함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바울이 죽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둠이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을 때 드러나는 것은 어둠에 있는 자신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인 중의 괴수임을 고백한 사도는 자신이 긍휼을 입은 것에 대해 증거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6)고 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바울의 행함이 아니라 오래 참으심으로 긍휼을 입히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일이며 또한 이것이 우리의 믿음임을 고백하며 사는 인생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3. 진리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4. 능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성경에서 말씀하는 노아의 홍수 전후의 인간의 평가는 어떠하며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6. 인간이 생각하는 선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7.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의 악함은 무엇이며 또 그런 인간이 어둠에 행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9. 빛 가운데 행하며 사귐이 있을 때의 증상과 그렇지 않을 때의 모습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10. 빛 가운데 행하는 신자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이며 또 알게 됨으로 행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런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이 하는 일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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