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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의 족보의 여인들

본문 / 1: 2- 6

 

1. 예수님의 족보

우리가 아는 것처럼 대부분의 족보는 한국이 그렇듯이 유대 사회도 부(아버지)계를 근본으로 해서 작성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라고 부르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 역시 부계를 근본으로 하여 작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혈통을 무시한 채 아무나 끌어 붙여 작성된 족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족보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16절에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16)고 말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요셉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혈통적으로 전혀 무관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실 2절부터 16절의 요셉을 낳았으니라는 구절까지만 보면 1장의 족보는 예수님의 족보라고 하기보다는 요셉의 족보라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혈통적으로 요셉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분명 요셉의 혈통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왜 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고 말하면서 이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애당초 혈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흘러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의 관습으로 본다면 족보에는 여인이 등재될 수가 없습니다. 여인을 하찮게 여기는 탓도 있었겠지만 여인은 출가외인이라고 하여 결혼을 하면 남편 가문에 그 이름이 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 사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 사회도 여인의 존재에 대해서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족보에는 네 명의 여인들이 등장하고, 16절의 마리아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의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여인들이 족보에 등재될 만큼 유명하거나 뛰어난 여걸과 같은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질렀고, 라합은 기생이며 룻은 이방 여인입니다.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는 다윗과 불륜 관계를 맺었고, 마리아 역시 정혼자인 요셉과 관계하지 않은 가운데 아이를 잉태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왕 여인을 등재하려면 사라나 리브가를 선택하였다면 족보로서의 모양새가 더 나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족보라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있는 여인들을 족보에 등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족보에 담겨 있는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2. 족보의 여인들

앞서 말한 대로 혈통적으로 본다면 오늘 본문의 족보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니라 요셉의 족보라고 해야 맞는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결국 요셉의 가문에 대해 나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족보에 네 여인이 등장하고 있음을 간과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여인들의 등장은 정상적인 혈통의 흐름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족보에 여인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다윗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요셉 또한 존재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는 것부터가 이미 아브라함의 가문은 정상적인 혈통의 흐름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가문처럼 정상적으로 아들과 며느리의 관계에서 후손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에서 후손이 태어나고 그 후손으로 족보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다의 혈통이기는 하지만 정상적인 흐름은 아닌 것입니다.

또한 유다가 원해서 다말과 동침한 것이 아니라 다말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본의 아니게 동침한 것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기 위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나 요셉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말하는 것은 애당초 혈통이라는 정상적인 흐름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족보였고, 그 약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여 주시는 것이지 인간의 뜻과 목적과 소원의 성취를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가 이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간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오신 슈퍼맨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십자가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은혜로 간주하고 또 그런 은혜를 얻고자 자신의 행위를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 행위라는 것을 간파해야만 할 것입니다.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마태가 이런 여인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등재한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에서 하고 있는 역할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죄인과 비천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음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들은 그러한 이유로만 족보에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과 윤리적으로 욕을 먹어야 하고, 이방인으로서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여인들을 등장시키고, 그것을 배경으로 예수님이 오셨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결국 예수님은 어떤 가문을 배경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라는 것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말이 시아버지인 유다를 속여서까지 동침을 한 것은 후손을 잇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단지 혈통을 이어가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가문을 잇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다가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지 않으려고 다말을 친정으로 보낸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말은 유다를 통해서라도 아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사모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나중에 다말의 이와 같은 생각을 알고 다말의 행위가 부정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38:26)는 평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이 없던 자신보다 약속에 관심을 두고 아들을 원했던 다말이 더 옳다고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택하신 가문에서 자기 자식으로 하여금 그 기업을 잇게 하겠다는 간절한 소원이 다말의 행위를 옳다고 인정하게 한 것입니다.

라합은 기생으로서 더러움에 몸을 담고 있던 여인이지만, 민족의 반역자가 되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구해줌으로써 하나님 편을 택했습니다. 라합 역시 기존의 여리고에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된 새로운 삶을 갈망한 여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은 우상을 숭배하는 고향 땅에서 재혼을 하면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 낮 선 땅으로 간 여인입니다. 같이 과부 된 불쌍한 시어머니를 끝까지 부양하고 여호와를 믿는 백성에 속하는 일에 자기 일생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네 번째 여인은 밧세바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남편이었던 우리야의 아내로 등장합니다. 그것은 다윗과 동침한 밧세바가 아니라 우리야의 사고방식을 높이기 위해서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야는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와 동침하라는 다윗의 말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밧세바를 내세워서 우리야의 희생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인들이 의미하는 것은 죄인이며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자로 사는 것을 소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고 비난을 받을 일에 불과합니다. 다말도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창녀보다 더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스스로 창녀보다 더 낮은 자리로 무너지더라도 자신의 아들로 하나님의 약속을 잇게 하겠다는 그 소원과 열망은 분명 의로운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정탐꾼을 고발하면 큰 상금을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 때문에 목숨을 건다는 것 또한 하나님의 관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룻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죽고 없는데 무엇 때문에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갑니까? 이방인 취급받으면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역시 하나님 때문에 고향을 떠나서 낮선 땅으로 간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로 보여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나를 죄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세상에서 권세 있는 자들과의 관계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족보에서 바로 그러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질 나라는 바로 이러한 나라입니다. 세상보다는 하나님께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것을 얻는 기쁨보다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아감으로 기쁨을 인생의 행복으로 여기는 백성들의 모임이 곧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나라인 것입니다.

세상에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낙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돈이 많다는 것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부름을 입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비록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몸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부름을 입어서 예수님의 거룩한 나라의 백성의 위치에 있다는 것으로도 신자는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의 백성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장 버림받아도 마땅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님이 그들의 세계에 오심으로 인해서 예수님과 같은 가문이라는 새로운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가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조상이 예전에 어떤 지위에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믿는 자로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멸망의 존재인 우리가 생명이 있는 존재로 뒤바뀐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 만으로도 얼마든지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다른 것을 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신뢰하는 그가 바로 참된 신앙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2. 태복음 1장을 요셉의 족보가 아닌 예수님의 족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과 계획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할 수 없는 것은 왜 그렇다고 합니까?

 

4.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 되어지는 모습은 어떤 모습이라고 합니까?

   

5. 마태가 다말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믿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6. 마태가 기생 라합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하는 믿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7. 마태가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하는 믿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8. 마태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통하여 알게 하고자 하는 믿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에서 신앙이란 어떤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10. 예수님의 백성다운 모습은 어떠한 모습이라고 말씀합니까?

   

11.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신자는 무엇만으로도 복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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