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의에 이르는 세례
본문 / 마 3:13-17
1. 세례 받으신 예수님
사람은 세상에 태어난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제 막 태어났으니까 죽음은 70년 80년 후에나 생각할 나중 일로 밀쳐 버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10년 20년 나중에 태어났다고 해서 먼저 태어난 사람보다 나중에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죽음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이 남자가 75세 정도, 여자가 82세 정도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평균 수명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예측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수명은 평균 수명이라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균 수명이 75세니까 적어도 70세 이상은 살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야말로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몇 년을 살았느냐?’보다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몇 년을 살았느냐가 인간에게 가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정말 가치 있는 것은 따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치대로 생각하자면 사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11절에서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요한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고, 요한은 줄 수도 없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도 자신을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도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를 받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말리면서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3:14)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의미로 받는 것입니다. 즉 세례는 죄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례를 예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죄인의 운명에 들어오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면서도 죄 있는 자들의 운명에 들어오셔서 죄인의 길을 걸어가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예수님의 세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당하신 일에서 죄인에게 주어질 인생의 마지막이 어떠한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의 저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에게 주어질 마지막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는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외침에서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에게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저주 아래서 영원히 버림받은 자로 끝나는 것이 죄인에게 주어진 운명인데 이 운명 안에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몇 년을 살았든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얘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하나님께 버림받은 운명에 있는 죄인의 마지막은 저주일 뿐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판단되어지는 것이지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으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시기 위해 죄인의 운명으로 들어오시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조차 고난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이루신 의
그런 요한에게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27:15)는 말씀을 하시고 세례를 받으십니다. 즉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를 이루는 길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중요한 의미는 의를 이루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루실 그 의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에게 유일한 길이고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시는 의만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을 자유롭게 하고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의로운 자가 되게 한다면 예수님이 이루시는 의는 죄인에게는 그야말로 생명의 빛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의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은 인간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돈을 곧 인간의 실상으로 생각합니다. 돈이 곧 현실입니다. 돈이 있어야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고, 꿈꾸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자신의 실상으로 현실로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인생 자체를 비관하게 됩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에게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은 죄인의 마지막과 실상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저주의 자식이라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며 현실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의에 마음을 두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가 우리를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 생명의 자리에 있게 한다면 이 세상에서 참된 의는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의밖에 없다는 뜻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루신 ‘의’외에 의로 여기고 불릴만한 것이 있다면 굳이 예수님이 의를 이루셔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루신 의 앞에서는 세상의 어떤 의도 의로 불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의는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오신 낮아지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한 몸에 받으심으로써 의를 이루신 것이며 앞으로의 세상은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의로 다스림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누구든지 모든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온다면 죄 없는 거룩한 백성으로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다스림에 굴복하고 인간의 의와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와 공로만을 의지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나름대로 의로 여기는 것이 많습니다. 선행을 하는 것도 의로운 것이고, 소위 불의에 대해 참지 않는 것도 의로운 것이고, 양심을 지키면서 뇌물을 받지 않는 것도 의로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의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규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의로 규정하시는 것은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의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님의 의로만 하늘의 생명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세상의 의는 의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의와 세상의 의의 다른 점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의 의만 의로 여기시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의 의의 중심에는 선과 악에 대한 구별이 뚜렷하게 살아있습니다. 선이 악을 처벌함으로써 의가 드러나는 방식이 세상의 의인 것입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도 자신을 의의 자리에 두고 자신보다 나약한 자를 돕는 방식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사람이 불의를 참지 못한다는 것도 역시 스스로 의와 악을 구분하고 자신을 의의 자리에 둔 채 악을 향해 나름대로 처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는 스스로 죄인의 자리에 내려오신 낮아지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세상이 볼 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악한 자를 위해서까지 자신의 몸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의인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의로우심이 죄인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기뻐하신다면 그것은 곧 세상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예수님의 의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의가 없는 세상에 의를 주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를 이루신 예수님 앞에서 신자가 구할 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이루신 의를 팽개치는 악한 행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하늘의 문이신 예수님
오늘 본문 16절부터 보면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십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하늘이 열리기 전에는 하늘이 세상에 대해 닫혀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세상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이고 사망인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생명 나무를 감춰 버리십니다. 그것은 곧 죄로 인해서 세상은 생명에서 멀어진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에 대해 하늘이 닫힌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곧 하늘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망에 처한 세상에 생명의 문이 열린 것인데, 그 문이 바로 의를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늘 문이 열린다는 것,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한다는 것,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다는 것, 이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신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신령한 일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령한 일로 인해 이 세상에 십자가가 있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이 십자가를 경험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십자가를 경험하며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한 세계를 살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 세계는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의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의만을 높이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경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경쟁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싸움입니다. 상대방을 이김으로써 자신의 강함과 우월성을 증거하고 그로 인해 힘 있는 자로 세상에 굳게 서고자 하는 욕망이 경쟁이라는 싸움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의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리스도의 몸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경쟁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비참한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생명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생존을 위해서만 발버둥 칠뿐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생명의 문제에서 마음이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라는 인간의 실상을 알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죄인된 인생의 마지막을 선명하게 보기 때문에 감히 생명의 문제를 팽개친 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세상 사람이 듣는다면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받으신 예수님에게서 죄인의 운명으로 들어가시는 어린양의 모습을 발견하고,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을 본다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사실적인 현실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루신 의를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때문에 참된 신자는 오직 예수님 의를 믿으며 그 의를 인생에 가장 귀한 선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1. 세례는 무엇이며 또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2.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과 모습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보시는 인간의 실상과 세상이 말하는 인간의 실상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4.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의만이 참된 의가 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세상이 예수님이 이루신 의로 다스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하나님께서 세상의 의를 의로 인정하시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세상의 의와는 달리 예수님의 의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 오실 때 하늘이 열렸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9. 신자가 십자가를 경험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10. 사람들이 생명이 아닌 생존의 문제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