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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새로운 세상

본문 / 4:12-17

 

1. 예수님과 천국

천국이라는 단어는 신자들에게 항상 죽어서 가는 좋은 곳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천국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신자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가지고 있는 동일한 생각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좋은 곳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에 대한 교회의 상식임과 동시에 세상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국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현실과 천국을 이원화시키는 오류를 낳았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즉 현실과 천국을 이원화하여 생각함으로써 현실은 현실대로 챙기고 천국은 천국대로 챙기겠다는 종교적 욕망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조차도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17)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과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인이나 세상이 상식처럼 생각하고 있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으니 빨리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식에 부합되는 이해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것과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물론 이 말이 종말이 없다는 말도 아니고 회개가 필요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예수님은 사람이 죽어서 들어가는 좋은 곳이라는 의미에서 천국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러한 천국을 들어가기 위해 회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회개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생명도 시작된 것입니다. 새로운 믿음과 새로운 소망도 시작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것의 시작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천국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란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전의 세상의 것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으로 개선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새로운 시대가 환경이 개선되어 살기 좋은 형편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 시대란 시대의 본질 자체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새마을 운동처럼 환경이 개선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세상은 오직 생존을 위해 떡으로만 살아가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복을 구하고 세상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다른 세상이 시작되는 것이고 또한 떡만 추구하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나님만 경배하는 세상이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시대이며, 새로운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세상, 즉 천국이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기존의 세상의 악함을 깨닫고 자신의 소망을 새로운 세상에 두는 회개한 신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은 자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4:12)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한 사람이고, 마태복음 32절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을 외쳤던 사람입니다. 또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세상의 실상을 외치면서 자기 죄를 자복한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잡힌 것입니다. 그것도 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반한 헤롯의 말 한마디로 인해서 요한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라보는 세상의 실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에 소망을 두게 될 사람은 자연히 세상의 악함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모든 소망과 기대가 무너져야 새로운 세상에 소망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 15절에서 말하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4:15)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16절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4:16)고 말씀합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왜 그들이 흑암과 그늘에 앉은 백성이며 사망의 땅에 거하는 백성들로 지칭되는 것입니까? 그들이 바로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소외되던 변방 지역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았던 까닭은 유대를 기준으로 변방 지역이었던 그 지역은 오래전부터 이방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그로 인해서 이방의 영향을 받아 이방의 문화에 많이 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역의 사람들이 정통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과 다름없이 여겨졌던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볼 때 변방 지역의 그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었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들이 큰 빛을 보았고, 그들에게 빛이 비취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씀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의 큰 빛은 정통을 자랑하는 자신들에게 비춰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이 택하신 정통 이스라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큰 빛은 유대인들이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아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취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야 말로 하늘에서 비취는 큰 빛을 빛으로 알아보고 영접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우리는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 내어놓을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즉 자신의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내려 주신 빛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내어놓을 자기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려 주신 빛을 바라보게 되는 것으로 그 빛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둠에 거하는 세상이 알아볼 수 없는 빛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즉 세상이 기대하는 영웅적인 모습의 빛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세상에 대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과연 누가 빛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을 빛으로 고백하며 자신의 생명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그들이 바로 흑암에 앉은 자신의 실상을 깨달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흑암에 앉았고 사망과 그늘에 앉아 있는 자신을 구원할 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그분밖에 없음을 알게 됨으로써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더 이상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분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부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있게 된 새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예전의 믿음은 자신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활동과 실천을 믿는 것이었고, 자신의 선함과 의로움을 믿는 것이 기존 세상의 믿음입니다. 세상은 이 믿음으로 신에게 나아가고자 했고, 신은 자신의 믿음을 보시고 복을 내려 주신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믿음은 그동안 믿었던 자신의 의와 실천과 선함이 모두 악한 것이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그 모든 악함을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하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이고 또 이것을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신자가 보아야 하는 것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앉아있는 세상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요한을 잡아 죽였던 것이 예수님 당시의 세상이었고, 그 세상은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지금의 세상입니다.

지금의 세상 또한 예수님을 환영하지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형통과 편안함과 복을 위해서 활동하시는 예수라면 그냥 묵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심판을 선포하시며 세상의 모든 것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분노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인 것입니다. 신자는 지금 이 세상에 앉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앉아 살아가는 곳이 이처럼 악한 곳임을 알아야 우리가 두어야 할 소망은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은 쉽사리 세상으로부터 거두어지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것에 기대를 걸고 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생명보다는 생존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존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생존을 책임지고 주관하시는 분이 분명히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생존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와 기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하고 우리의 의지와 기대를 가지고 우리가 원하는 일을 이루려고 애쓴다고 해도 우리 뜻대로 안되는 것이 생존의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관자가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존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 문제를 생존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는 경제위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더욱 심각하다고 합니다. 증권시장의 폭락과 실물경제의 침체 등 여기저기서 총체적인 위기라는 목소리가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다들 불안해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위기를 경제문제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나무뿌리에 도끼가 놓여 있는 것이 세상의 실상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흑암과 사망과 그늘에 앉아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것이 더 큰 위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을 보고 사십니까? 경제문제로 인해서 위기라며 불안해하고, 힘들다고 하면서 하소연하는 이 세상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입니까? 영원한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이 새로운 세상만이 참되며 하나님 앞에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세상에서의 자기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아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이 새로운 세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감사하시면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이 내게는 소중한 삶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날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교회가 가지고 있는 천국에 대한 상식과 또 그로 말미암은 오류는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과 회개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예수님으로 임한 새로운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왜 그래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4. 흑암에 앉은 백성은 누구이며 또 그들을 왜 그렇게 본다고 합니까?

 

5. 유대인들은 왜 자신들에게 큰 빛이 비췰 것이라 여기고 살며 또 그에 반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큰 빛이 비춰질 자는 어떤 자이며 왜 그렇다고 합니까?

 

6. 주님으로 온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믿음과 예전의 믿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7. 우리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가 주안에서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9.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보기에 위기와 하나님 보시기의 위기는 어떻게 다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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