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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애통하는 자

본문 / 5: 4

 

1. 애통이라는 말의 의미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이 자신과 함께 해 주시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주길 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이 함께 해 주시면 힘든 문제도 해결되고 세상의 복을 실컷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의 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할 수 있고, 이로 인해서 수많은 교회가 영원한 생명과 상관없는 길에 서 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면 그것이 곧 복된 나라인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의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의 상태는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던 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심령의 가난이고 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애통이며 온유와 긍휼 핍박 등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피하고 싶은 것을 예수님은 복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세계, 즉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모여들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의해 병고침을 받거나 그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을 좇는 것에 대해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칠 능력이 있는 분이니 저분과 함께 한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물러가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에 대한 예수님의 선포는 그러한 환상을 무너뜨리면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복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가 여전히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복의 환상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세계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즉 참된 복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자기 세계를 이루어 주기 위해 오신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구원에 붙들려 있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는 모든 성경을 인간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도 인간 구원을 위한 구절로 해석해 버립니다. 즉 신자가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나와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위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위로도 문제 해결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일반적인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평생을 불치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궁핍해지기도 하고 삶의 온갖 고통을 겪어 볼 대로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평생의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그 순간만큼은 애통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앞으로 또 다른 고통이 올 수도 있는데 그때도 내가 너희를 고통에서 건져 주겠다는 뜻으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평생을 불치병을 안고 살았다면 그 고통은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세로 인해 슬퍼하며 애통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전혀 다른 애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애통이 슬픔이고 고통이지만 애통이 곧 복으로 여김 받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복된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애통은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슬픈 일을 겪으면 심적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주어지는 위로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애통에 주어지는 위로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신자는 부활합니다’, ‘신자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면 다시 만날 것입니다라는 말들이 진심으로 위로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들로 인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사라지고 애통이 멈추어지면서 위로로 가득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죽은 사람이 사랑하는 내 자식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러한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합니다.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나지 않은 이상 위로가 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세상에서 겪는 슬픈 일과는 다른 차원의 애통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애통해하십니까? 무엇이 우리를 애통의 자리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늙어감으로 애통해하기도 하고 또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초라함을 두고 애통해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애통이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2. 애통은 말씀의 완성이다.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합니다. 여기 보면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는 고백을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사역 마지막 때에 쓴 서신서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기에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믿을수록 자신을 죄인의 자리에 더 깊이 내려놓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같은 신자로서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신앙생활에 열심을 갖게 되고 선한 일도 행하면서 자신이 신자답게 돼간다는 인식을 갖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전도와 교회 설립과 같은 수많은 일을 하고 예수님의 은혜에 더 깊이 들어갔을 때 자신을 두고 죄인의 괴수로 일컫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겸손의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행하던 일을 회상하면서 한 말도 아니고, 통속적으로 내뱉는 말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아갈수록 자신의 죄인 됨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을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는 이 고백이 바로 사도 바울의 애통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 할수록,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자신은 어리석고 더러우며 추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기에 나오는 고백이고, 나오는 애통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드러나는 말씀이 완성된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완성으로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신다면 예수님이 함께 하는 백성에게서는 말씀이 완성된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 대한 선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으로 드러나고 애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상태가 말씀이 완성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완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오해한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선행을 통해서 말씀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실천할 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서신은 디모데후서입니다. 그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1-12)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였습니다. 그러한 그도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자기 주변의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다면 죄인의 괴수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과 다른 사도들보다 바울의 업적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모든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로 여겼습니다. 즉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인한 결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보면서 주를 핍박했던 자신조차도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은혜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신은 더럽고 추한 자로 드러날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완성자인 예수님이 바울과 함께 한 결과였고 따라서 사도 바울의 애통은 곧 말씀이 완성된 모습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신자는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갈수록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 그리고 연약함과 더러움만 더 세밀히 드러나게 됨으로 날마다 저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애통이 있는 것을 복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3. 애통하는 자에 대한 위로

애통하는 사람에게는 애통의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족이 죽었든, 문제가 생겼든 반드시 애통과 슬픔의 이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애통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앞에서의 자신의 상태입니다. 사람으로 오시고 자신을 핍박하는 자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수록 자신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 매달려 살아가는 욕망 덩어리에 불과한 자신의 실체가 애통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이러한 애통이 없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힘든 일이 있으면 슬퍼하고 애통해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라면 힘든 일에서도 생각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슬픈 일로 인해서 애통해하고만 있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과 십자가 복음이 자기 삶을 통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는 힘든 일에 대한 애통보다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십자가의 복음이 자신의 삶을 통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자신의 못난 현실이 더 큰 애통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이 있을 때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를 먼저 소원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위로와 간섭하심이 있기를 더 갈급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애통이 있는 자에게 위로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관계에 있게 되었고, 나 같은 자를 거룩하신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있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크신 위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의 상태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복된 나라입니다.

이러한 위로는 아무리 수십 년간 교회를 다녔다고 해도 자신이 십자가의 은혜로 충만하지 않는 것으로 애통해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무덤덤하게 교회 출석하고, 교회 봉사에 게으르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종교 생활에서도 결코 누릴 수 없는 위로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위로를 원하십니까? 돈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돈이 위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돈이 쥐어져야 비로소 마음에 안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위로는 잠시 동안으로 끝납니다.

신자는 세상의 걱정과 염려 속에서 하나님이 크고 풍성한 은혜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길로 자신을 인도하심을 잊고 있었음을 생각하고 애통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생으로 근심케 하는 것이 아니며 심판 대신 구원이라는 것을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잊어버리는 자신을 두고 애통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계획과 뜻을 가지고 자신을 부르시고 지금도 이런저런 어려움과 환난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는 것으로 애통해야 합니다.

그러한 애통이 있어야 나 같은 자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복된 나라에 속하게 하신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복된 나라에 있게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크신 위로로 그 심령에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께서 모여 든 사람들에게 세상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복에 대하여 선포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게 되었을 때와 그리고 믿음의 세월이 흘렀을 때 가지게 되는 마음과 바울 사도의 마음의 차이는 어떻게 다릅니까?

 

3. ‘죄인 중의 내가 괴수라고 하는 바울 사도의 고백은 무엇이며 또 그 내용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4.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된 상태가 무엇이라고 하며 또 그 의미를 오해한 사람들은 그 완성을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고 합니까?

 

5. 그 누구보다도 큰 업적을 남긴 바울 사도임에도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취급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말씀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신자에게 나올 수밖에 없는 애통의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신자의 애통에 대한 위로는 무엇이며 또 그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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