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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죄와 세례와 새 생명

본문 / 6: 1- 4

 

1. 죄와 인간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또 그로 말미암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는 필히 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죄에 대해 말하기를 거북스러워합니다.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영향이 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긍정적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믿으면 복을 받고 문제가 해결되고 하늘에서 상이 크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과 상관없는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된 이야기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를 건너뛰고 예수를 말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은혜는 희미해지고 세상의 평안을 보장해주는 복음 아닌 복음과 예수 아닌 예수만 언급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다른 복음이며, 다른 예수인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이 무엇인 것입니까? 아마 우리는 죽음을 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죽음을 자신의 경험으로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는데 과연 누가 죽음을 자기 경험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죽음은 단지 타인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나 또는 무엇을 죽음이라고 하는지에 대한 지식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누구도 죽음을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경험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시작은 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죄를 극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가 죄로 시작하게 되면 죄를 극복할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선한 실천은 가능하지 않음을 말하게 되고 또 행함을 조건으로 해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 곧 죽음 아래 있는 죄의 모습임을 증거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의 교회의 위기는 설교가 죄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로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신앙으로 왜곡되어 가르쳐지고 있고 그런 가르침으로 인해 죽은 자에게 생명이 되는 십자가의 피의 은혜는 신앙의 세계에서 철거되어 묻혀질 뿐만 아니라 오직 인간의 행함의 공로만 부각되어 자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사도 바울은 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는 말로 죄에 대하여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은 죄와 은혜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함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숙명론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며, 죄를 이길 수 없기에 죽는 순간까지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숙명론으로 받아들이며 죄를 짓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죄를 용서하신 은혜만 고백하면 될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기에 바울은 그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용서의 은혜를 받았다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죄를 이겨나가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이겠습니까? 그 역시 죄에 대한 곡해일 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자는 말은 결국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까?

 

2. 죄와 하나님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절부터 그것에 대하여 말을 합니다. 2절부터 보면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2-4)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서 더 살겠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임을 말합니다. 세례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례를 받은 후부터 죄를 짓지 않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죄를 짓더라도 그 전보다 죄를 짓는 빈도가 더 줄어들었다고 생각합니까?

죄의 빈도가 줄었을 리가 없지만 설령 죄의 빈도가 줄었다 할지라도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10)라고 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하나라도 범했다면 전부를 범한 것과 같다고 말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례의 의미인 예수와 합하여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또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 것입니까? 예수와 합하여 죽은 것이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지는 6절부터 보면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6-7)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신자의 죽음을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다는 말이 죄가 명령하는 대로 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죄를 따르지 않고 범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에 따르면 죽음은 죄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뜻합니다. 죽었으니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났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누리는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죄에 대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부터 보면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0-11)라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죄에 대하여 죽은 신자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죽음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새 생명의 사건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하여 죽어서 죄로부터의 자유, 즉 사망에서의 해방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 즉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례는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자리에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와 함께 살아남을 믿게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합니다.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신자가 지향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닌 생명의 나라라는 뜻이고 따라서 우리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죄에 거하는 것을 지향하거나 당연히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이길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예수와 함께 나를 죽이시고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그 은혜의 세계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은혜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노력이나 실천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기적의 사건에 마음을 두며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신자를 애통으로 끌어갑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며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로 인해 회개하며 애통하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 안에서 성취된 새 생명의 사건을 보게 되고, 기쁨과 감사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이라는 것으로 죄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머문다면 그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3. 구원 이후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은 은혜받은 이후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 회개한 이후를 말하며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그에 합당한 변화가 있어야 하고, 회개를 했다면 역시 그에 합당한 변화가 있어야 하고, 은혜를 받았어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에 대하여 다시 로마서 6장에 보면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7-18)고 합니다. 사람의 관심은 본능적으로 모두 자기 몸을 향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몸을 향한 욕망으로 자기 몸을 위해 사는 것이 곧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을 십자가에서 바라본다면 미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몸을 사랑하는 나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신자에게서는 한 가지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몸을 사랑하고 몸을 위해 사는 자신의 본질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죄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인해서 자기 몸을 사랑하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 죄의 몸이 죽은 것이고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자기 몸을 전혀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항상 이 부분을 오해하는데 죄의 몸이 죽고,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죄를 이긴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본질을 알게 된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옛사람과 다른 것은 자기 몸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몸을 사랑하고 몸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자신으로 인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게서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세계를 보게 되며 그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18절에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구원을 받았다면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나 같은 자에게 구원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우리의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서 깨닫게 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그 기쁨에 매임으로 자연히 나타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알았다면 은혜받음에 대해 보답하기 위해 변화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허락하신 은혜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낮아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본다면 자신의 노력이나 자기 믿음으로 행한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은혜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변화이고 은혜에 합당한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1-12)고 말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으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아도 은혜를 말하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은혜는 온통 자기만족을 위하고 자기만족에서 표출되는 것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써 알게 되는 은혜는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고 그로 인해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으며 그리스도로 다시 사심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채울 것은 없습니다. 신자는 단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게 된 하나님의 은혜에서 크고 놀라우신 긍휼과 사랑을 알고 은혜로 주신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으며 그리스도로 성취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가 이 은혜의 세계에 눈이 열리고 그 가치를 알게 되며 마음에 두게 된다면 세상의 무엇으로도 만족 되지 않는 마음은 얼마든지 십자가의 은혜로 만족될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죽음은 세상에서 말하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소망이고 기쁨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신자의 죽음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이라는 새 생명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죽음과 삶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안에서 완성된 상태이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매일 매일을 주를 바라보며 주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얻게 된 새 생명의 기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알려 주셨다고 합니까?

 

2. 늘날의 교회의 위기는 무엇이며 또 그로 말미암은 부작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곡해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죄에 대한 이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예수와 합하여 죽었다는 것, 즉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5. 바울은 주와 함께 세례를 받은 신자에 대하여 어떤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까?

 

6.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7. 주와 함께 세례를 받은 신자에게 죄는 어떠한 증상으로 이끌어 간다고 합니까?

 

8. 죄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9.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신자가 알게 되는 현상은 무엇이고 또 그 앎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살게 되고 또 그런 삶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바울이 말하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11. 은혜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변화와 은혜에 합당한 삶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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