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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비판하지 말라

본문 / 7: 1- 6

 

1. 세상과 다른 세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해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자신을 살게 해준다고 여기는 돈을 의지하게 됩니다. 돈만 있으면 자기를 위해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의 그 중심에는 항상 돈 문제가 개입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돈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마음대로 안되는 돈으로 인해서 낙심하고 인생을 비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높아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장 죽어도 마땅한 것이 바로 납니다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불쾌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나쁜 사람도 잘먹고 잘사는 세상에서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말은 부당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옆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봐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누가 죽였는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능력으로 수많은 기적을 행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들어오실 때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하게 환영을 한 것도 모든 고통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를 예수님에게서 기대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힘없이 십자가에 사형수로 매달려 죽어갑니다. 자신들의 소망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군중들은 여기에 분노하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예수라는 존재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자기의 모든 소망과 기대가 버려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기 부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중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끝까지 자기의 소망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유대인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자는 바로 우리 자신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인간은 아예 처음부터 멸망의 자식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너희의 소유가 아무리 넉넉하다고 하여도 너희의 끝은 영원한 죽음일 뿐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가 바로 하늘의 용서의 빛이 비췬 사람이고 그는 생명이 없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을 재물을 기준해서 보지 않고 생명을 기준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이방인과 같은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즉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용서의 가치를 별대스럽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용서로 사는 세상이 보이기보다는 돈으로 사는 세상이 보이게 되고, 이로 인해 용서의 은총으로 감사하는 것은 없이 돈이 없어서 염려하고 낙심하는 것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율법과 비판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예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자비와 긍휼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배웠습니다. 율법을 실천하여 자기 의를 만들어 내고 그 의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항상 율법을 실천하는 인간의 의를 기준으로 타인을 비판하고 심판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7:1)는 말씀은 율법 아래 살아가는 이스라엘과 연결하여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 가장 유치한 해석은 도덕과 윤리적인 해석입니다. 비판은 나쁜 것이니까 비판하면 안됩니다. 남을 비판하면 나도 남에게 비판을 받게 됩니다.’라는 식의 해석이야말로, 성경을 떠난 해석이고 예수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없이 단지 세상의 도덕을 따라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초등학교의 도덕 시간이 교회로 옮겨온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5장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을 실천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의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의가 기준이 되어서 그 의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아니라 다른 의, 즉 그리스도의 의가 기준이 되어서 세상을 판단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율법을 실천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기준하여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2-4)는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것은,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이 의의 기준이 되어서 세상을 판단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율법 아래 살아가던 시대에 비판은 당연한 것입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율법에 미치지 못한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율법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율법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온 힘을 다해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율법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차단해 버리고 오히려 의의 자리에 서서 타인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지 비판은 윤리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사는 시대는 마침이 되었고, 이제는 예수님의 의, 즉 용서의 은총으로 사는 새로운 나라가 임하였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그의 나라는 율법을 실천하는 행함이 의로 여김 받고 그 의로 자신을 자랑하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이 유일한 의로움이 되고 그 의를 믿는 자가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 안에서 거룩한 자로 여김받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함이라는 기준이 사라지고 없고, 대신 예수님의 의라는 새로운 질서가 존재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은총 아래 있는 자기 백성을 율법을 기준으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을 기준으로 누군가를 비판한다면 그러한 자에게는 용서의 은총이 아니라 법으로 대하십니다. 즉 내가 타인을 비판한 법을 기준으로 우리를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3. 비판할 자격이 없는 인간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의 무엇을 비판합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8:11)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바리새인은 자신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세리와도 같지 않다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합니다.

우리도 바리새인과 같은 수준에서 타인을 판단하고 비판합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라는 법 아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도를 하고 또는 하지 않고의 문제는 티끌과도 같은 문제일 뿐입니다. 토색, 간음, 불의라는 문제도 티끌과도 같습니다. 토색 간음 불의 때문에 인간을 심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자기 사랑이라는 완악함을 보십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며 오직 자기를 위해 살아가고, 자신이 힘 있는 존재가 되어서 자기 힘으로 원하는 인생을 살려고 애를 쓰는 악함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는 들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3-5)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빼는 것입니까? 하지만 누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뺄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누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들보를 빼내는 것은 고사하고 내 눈에 있는 것이 들보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비판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티가 있다면 매우 껄끄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들보가 눈에 있다면, 물론 티끌과 대비하기 위한 표현이지만 들보가 있다면 눈은 아예 뜰 수가 없고 큰 고통에 빠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들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느낌도 고통도 없이 살아갑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상을 생각한다면 그런 내가 티끌과 같은 자신의 행함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비판이 나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다른 사람을 용서의 은총 안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법을 기준으로 바라보고 비판을 한다면 그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서 2장의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2:13)는 말씀처럼 긍휼이 아닌 법을 기준으로 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따라 지체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비판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진리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면,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은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티끌 같은 실천을 자기 자랑으로 삼으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일쑤인 내 자신을 바라보면 정말 보배로운 것은 예수님의 용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용서의 가치와 소중함을 가볍게 여기면서 재물을 힘으로 삼으며 살아갑니다. 마치 오늘 본문 6절의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7:6)는 말씀처럼 거룩한 것을 발로 밟는 개, 돼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 돼지와 같은 짐승이 아니라면 진주라는 보배의 소중함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의 거룩한 것을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지 못한 채 여전히 세상의 재물을 소중히 여깁니다. 예수님의 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 돼지와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쾌하게 여겨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 자체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여전히 사단의 유혹에 빠져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불쾌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희망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의의 나라입니다.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힘없이 못 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하나님의 용서를 가치 있게 여기는 자와 별스럽지 않게 여기는 자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3.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한 까닭은 무엇이며 또 그로 인하여 그들이 가지게 되었던 삶의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4.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5.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가장 유치한 해석은 무엇이라고 하며 꼬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나라는 어떤 나라라고 합니까?

 

7.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 즉 인간의 들보는 무엇이라 합니까?

 

9.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또 그걸 말면서도 그 일을 할 수는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0. 개 돼지는 어떤 존재이며, 말씀 앞에선 우리가 그런 개, 돼지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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