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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께로 돌아온 자들이 부를 감사의 노래

본문 /  사12: 1- 6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사12: 1- 6)


1. 무엇으로 인한 감사

우리는 만약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이제 그만 거두어 천국으로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천국 보내 주시겠다는데 우리가 망설일 이유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미련 없이 주님 손잡고 세상을 떠날 것 같은지 아니면 세상을 떠나기 싫어 예수님의 손길을 피해 세상 속 깊숙이 숨어버릴 것 같은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고 있기에 나는 천국 가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천국보다는 세상에 더 집착하여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천국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지금 당장 세상과 분리되는 천국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 이후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음 다음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가운데 임재 하여 있는 나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누리며 사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수단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이고 그 나라를 소망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지금 우리 가운데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는 느끼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뜻대로 삽니다. 그만큼 우리는 세상 것을 더 친밀하게 느끼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 천국은 단지 죽음 다음에 가는 세상일 뿐입니다. 죽음을 원하지는 않는데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니까 어쩔 수 없이 죽은 이후에 가는 곳으로는 싫지 않다는 것이지,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기는 싫다는 것이 대부분의 반응일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천국을 소망 한다', '나는 세상보다 천국이 좋다'라는 것은, 자신에 대한 막연한 생각일 뿐 세상에서의 삶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세상에 집착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단지 우리의 믿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평소 천국을 소망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갈급한 마음으로 살았던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세상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갈급한 마음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세상에 집착하고 자신에게 집착하여 살아간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을 붙들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이고, 신자는 매일같이 그런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려 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으니 구원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임과 동시에 구원된 자에게 필히 있을 수밖에 없는 감사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된 자에게 감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해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구원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에게서 바라보고 소망할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만약 영원한 생명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을 두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감사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서 내가 진정으로 감사가 있는 자인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감사가 무엇으로 인한 감사, 즉 젯밥으로 말미암은 감사는 아닌지 점검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진정한 감사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감사 없는 신앙

오늘 본문인 이사야서 12장은 그 옛날 출애굽 때에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감사의 찬양을 했던 것처럼 앞으로 있을 새로운 해방의 날,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는 그때에도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할 것이라면서, 그 찬양과 감사의 노래를 전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12:1)는 말씀을 합니다. 마지막 때에 주께로 돌아온 자가 자신이 주께로 돌아오게 된 내막을 알게 됨으로써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하는 '그 날'이란 주께로 돌아온 날을 뜻합니다. 주께로 돌아온 날 자신이 주께로 돌아가게 된 일을 생각하니 자신을 향한 주의 진노가 쉬었고, 자신을 안위하심으로 주께 돌아오게 되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감사하겠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로 돌아오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동일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여호와께서 그 진노를 쉬는 것이 없이 주께로 돌아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주께로 돌아온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자였으나 진노를 쉬시고 나를 안위(위로)하심으로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신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서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진정한 기쁨과 감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상관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 받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장에서 실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의 현장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의 진노를 온 몸으로 홀로 다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가를 맛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이시는 아버지의 진노의 현장에서 우리의 사사로운 형편이나 사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부어져야 할 진노를 아들에게 붓고 계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쉬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진노를 거두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진노를 거두신 이유가 아들이 모든 진노를 홀로 담당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지 못한다면 진정한 구원의 감사와 기쁨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의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주께로 돌아왔다면 여호와의 진노가 거두어짐과 안위하심이 있음으로 인한 감사의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에게 이런 감사의 노래가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주께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께로 돌아가자'는 결심을 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항상 주를 원하기보다는 세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이 동생인 아벨의 제사는 열납 하시고 자신의 제사는 열납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해하는 가인을 향해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창4:7)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죄를 원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살인이나 도적질 같은 것으로만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 무엇을 해도 자신의 욕심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만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소원과 욕심을 이루는데 동원하여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은 죄를 향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보다는 항상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붙들어서 주님께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2절)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구원이시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고 노래시며 구원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아는 것만으로도 신자는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으며, 힘을 가진 자로서 기뻐하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 돌아온 신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감사의 노래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항상 자신에게 힘을 달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힘이 되는 것을 주시는 분으로, 노래하고 기뻐할 수 있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날마다 지키시고 안위하심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없고, 힘이 없고, 노래가 없고, 감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는가와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바라보는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힘이시고 노래가 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힘이 될 만한 것이 주어졌을 때 힘이 납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는 돈이 곧 힘입니다. 돈으로는 뭐든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을 때는 힘이 나고 돈이 없으며 힘이 빠지며 살 재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신자가 돈이 곧 힘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진정한 자기의 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돈을 힘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은 힘이 아닙니다. 단지 힘으로 여기는 돈을 주시는 분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는 힘이 안 되고, 감사도 없고, 노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3. 신자의 감사의 노래

그러나 오늘 본문 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주께로 돌아온 신자에게는 기쁨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입니다. 구원의 우물은 마르지 않는 우물입니다. 따라서 기쁨이 마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에는 풍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풍성함을 맛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면 앞서 말한 대로 우리 마음이 다른 것을 향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사12:4-5)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함이 있습니까? 막연하고 통상적인 감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힘이 되고 기쁨이 있고 하나님이 곧 노래가 되는 그런 감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진심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날마다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것이 힘이 되는 신자만이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인간이 하는 통상적인 감사는 받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이 되면 한 해 동안 하나님께 받은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한 해 동안 하나님께 받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남들이 받지 못한 좋은 것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받은 것이 있어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면 상대적으로 우리와는 달리 우리가 받은 것을 받지 못한 자들은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도대체 받지 못한 그들은 무엇으로 감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자가 받은 것으로 감사한다면 그 감사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것에 감사를 하다가도 자신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받은 사람을 보게 되면 순식간에 그 감사는 사라지게 됩니다. 과연 이러한 감사가 진정한 감사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이 주신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열매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세상이 좋아하는 돈과 명예와 권세 같은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사12:4)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곧 감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은 곧 우리의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만국에 선포하며 그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나를 통해 표현하며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받고 안 받고 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하나님의 행하심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고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행하심만을 높이게 되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 시온의 거민아 소리를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사12:5-6)고 말씀합니다. 신자에게 찬송의 노래, 감사의 노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우리에게는 구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여호와가 힘이고 기쁨이고 노래고 감사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여호와를 알게 되고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알고 만남으로 진정한 감사와 진정한 노래가 우리의 삶 가운데 항상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목적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됩니다. 우리 모두가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기까지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며 우리가 그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고 노래가 되어야만 하는 존재들입니다. 이 하나님을 보시고 아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들의 삶과 입술에서 감사의 찬양의 제사가 끊임없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천국을 믿는다 하면서도 천국백성으로 사는 것은 싫어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감사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주께 돌아온 자들이 감사의 찬양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이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5.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고 주를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신앙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받은 세상 것으로 감사할 수 없는 이유와 하나님의 행하심이 감사가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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